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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청년이 문을 열었다. 몇달 전 우리 가게에서 휴대전화를 개통한 청년이었다. 전화를 개통하던 날, 전산상의 문제로 시간이 지체됐다. 제법 긴 시간동안 가게에 머물렀던 청년은 군에서 갓 제대를 했다고 했다. 육군 장교 출신인 남편은 군 복무를 끝낸 청년이 대견한지 이것저것 물어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은딸과 동갑이라 남편이 무척 살갑게 대해 준 청년이었다. 단정한 옷차림과 침착한 말투가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워 보였다. 다시 찾아온 청년은 통신요금이 빠져 나가는 통장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달라고 했다. 간단한 것이라 바로 처리해 주었는데 머뭇거리며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남편을 찾았다.

     오늘은 바빠서 못 올지 모른다고 하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청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실은 돈을 빌렸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갓 제대한 청년을 어엿한 남자로 대해 주었던 것이 용기를 내게 했는지도 모르지만 어이가 없어 그건 좀 곤란하다고 했다. 처지를 바꾸어 보아도 그렇지 누가 선뜻 돈을 빌려 줄 수 있겠는가. 그래도 청년은 머뭇거리며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돈이 필요하냐고 물어 보았다.

 꼭 사야 할 물건이 있는데 내일까지만 파격할인을 하고 있어서 그걸 사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만 아직 입금 날짜는 멀었고 병 중에 계신 부모님께 말씀 드리기도 뭣해서 그런다는 것이다. 십만 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순간 내가 더 당황했다. 너무나 순진한 얼굴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청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군복무까지 마친 청년이라고는 하나 지금 보니 아직 철부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세속의 잣대로 사람을 바라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잠시 망설이다가 돈을 빌려 주겠다고 약속을 해 버렸다. 지갑 속에 현금이 그만큼 없었기에 늦은 오후에 다시 한 번 들르라고 했다. 청년은 환하게 웃으며 문을 열고 나갔다.

    은행에서 돌아와 청년에게 빌려 줄 돈을 챙겨 서랍에 넣어 두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청년을 믿고 빌려 주자는 마음이 앞섰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빌려 주려는 돈은 어쩌면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한 동네에 사니 받으려면 어떻게든 받을 수 있겠지만 그런 과정을 생각하니 갑자기 내가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가 싶어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이미 약속을 한 뒤라 마음 속의 갈등을 거두어 버렸다.

 퇴근 시간이 지나 청년이 다시 찾아왔다. 다짐을 받듯 청년에게 말했다. 딸아이와 동갑이니 엄마처럼 편하게 말하겠다. 네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돈을 빌려 준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네가 사회에 나와서 처음으로 이런 부탁을 한다고 생각한다. 아줌마가 고민을 좀 했지만 약속을 했기 때문에 빌려 주기로 했으니 우리 아름다운 약속을 한 번 해보자고 했다.

 청년은 아까보다 한결 자신있는 목소리로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것이며 이 일은 아줌마랑 둘만 알았으면 좋겠다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나는 웃으며 돈은 언제 갚을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열흘 후에 갚겠다고 했다. 차용증을 썼다. 돌려주겠다고 한 날짜와 두 사람의 이름을 적고 각자 사인을 했다. 어쩌면 안 돌아올지도 모를 봉투를 청년에게 건넸다.

 어둠이 내린 거리로 나서는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빌려 준 돈의 금액이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돈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어려운 부탁을 해서 거절당하지 않고 자신을 믿어 준 것에 대한 것이라면 의미는 달라진다. 만약 갈등을 하다가 약속을 깨고 빌려 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내가 몇 배로 더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며칠이 지났다. 주말에 청년에게서 전화가 왔다. 계좌번호를 알려 달라고 해서 문자로 알려 주었다. 잠시 후 '감사했습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짤막하지만 마음이 훈훈해지는 문자가 날아왔다. 빌려 준 돈은 약속했던 날보다 닷새나 빨리 되돌아왔다. 돈은 내가 빌려 주었는데 왜 그렇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청년을 오롯이 믿지 못했던 마음 한편이 붉어졌다.

 월요일 날 출근해 차용증을 꺼냈다. 서로 믿지 못하는 세상과 앞으로 얼마나 부딪히며 살아가야 하는지 너는 아직 잘 모를 것이다. 그럴 때마다 세상 어느 한 귀퉁이에서 널 끝까지 믿어주려고 애쓴 사람도 있었다는 것을 한번쯤 기억해 주렴. 혼자 중얼거리며 파쇄기에 차용증을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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