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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군에서 제대하던 날이었다. 오전 9시에 '제대증'을 손에 거머쥔 아들은 단거리 육상 선수처럼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 준비된 간편복으로 대충 갈아입은 뒤 선걸음에 인천 국제공항을 향해 내달렸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탑승 절차를 밟은 뒤 오후 1시에 이륙하는 캐나다행 비행기 탑승 대열에 섰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먼 나라를 향해 하늘을 날고 있었던 아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들은 대학에서 영어교육학을 전공했다. 우리말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어려운 영어를 전공으로 선택한 아들이 대견하고 기특했다. 시간이 갈수록 조기 유학이다 뭐다 해서 외국어에 능숙한 아이들을 상대로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될 아들이 걱정되었다. 제대하고 복학하기까지는 3개월여의 공백 기간이 있었다. 석 달 정도야 적당히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조금이라도 전공과목에 보탬이 될 기회로 쓰겠다는 아들의 심중을 알고부터 나대로 생각이 깊어졌다. 부모와 자식 간의 탯줄은 우선 보기에는 떨어진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영혼으로 이어진 관계가 아니던가. '캐나다 유학'을 마음먹었다.

 그즈음, 남편은 회사 일로 나는 가게 일로 코에 단내가 날 만큼 바쁘게 지낼 때였다. 무일푼으로 시작한 살림살이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허기만 면했지 목돈은 어려웠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비빌 언덕이라도 찾았지만, 매번 해결책은 부부뿐임을 각인시켰다. 궁색한 살림살이에 '외국 유학'에 드는 만만찮은 경비는 개미 등에 실린 밤톨만큼이나 버거웠지만, 자식 일이라 용기를 냈다. 매월 들어가던 적금을 중도해지하고 지출을 줄였다. 남편은 다니던 회사에서 대출을 얻어 보태고 내 일터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부지런을 떨었다. 아들은 아들대로 현지에 도착하면 시간제 일자리라도 구해보겠다고 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위탁기관을 정하고 목돈을 마련해 부쳐야 하는 데는 우리 부부의 허리에서 '휘청'하는 소리가 났다. 마치 활이 화살을 날려 보낼 때 내는 소리처럼. 아들이 그렇게 숨 가쁘게 유학길을 서두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의뢰한 기관에서 분기별로 전공과목 대학생을 상대로 하는 '외국 유학과정' 일정이 제대 날짜와 맞물렸다. 제대한 아들을 집으로 불러 따뜻한 '집 밥'이라도 먹이면서 모자지간의 정을 느끼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아들에게 무엇이 우선인지를 생각한다면 전공하는 공부에 유익한 체험이 될 외국 문화를 단기간이라도 접하도록 거드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3개월여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 3학년을 여는 첫날이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앞뒤 귀가 딱 맞아떨어졌었다. 지금도 그때만 떠올리면 아찔하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얼마나 잘한 일이고 다행이었다 생각된다. 아들 역시 숨 가쁘게 떠났던 3개월이 외국 문화를 경험하는 다시없는 기회였다며 어려운 형편에 분에 넘치는 기회를 선물한 부모가 그때만큼 고맙게 느껴질 때도 없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가슴 뿌듯해했는지 모른다.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기억은 간데없고, 생활과 문화가 다른 곳에서의 특별한 경험이 아들의 앞날에 의미 있는 추억으로 남을 것에 만족했다. 그때를 계기로 아들은 훨씬 멀리 내다보는 공부, 넓은 안목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웠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부모와 자식은 활과 화살 같은 존재다. 화살은 활이 휘면 휠수록 멀리 날아가는 법이다. 화살이 과녁으로 정확하게 날아가기 위해서 활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활이 흔들리면 화살은 제대로 날아가지 못한다. 활은 화살이 바르게 날아갈 수 있도록 온 정신을 다 하며 산다. 오직 활로서의 바른 자세를 보이느라 허리가 굽어지는 것도 모르면서 늙어간다. 만약 부모가 잘못 만들어진 활이면 화살 또한 잘못 날아가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나는 아들 앞에 떳떳하고 당당한 활이고자 했다. 아들 또한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는 화살의 역할을 다하며 살고자 했다.

 화살은 활이 많이 휘면 휠수록 멀리 날아간다. 멀리 날아간 화살일수록 역으로 그 화살을 날려 보낸 활은 많이 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활은 휘어질수록 그 고통이 심하겠지만, 오직 화살을 멀리 날려 보내기 위해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올해로 구순이신 친정엄마는 등이 활처럼 휘어 코가 땅에 닿을 정도시다. 자식을 위해 온 힘을 다한 다음에 휘어진 활이지만 한 번도 불편해하지 않으신다. 평생을 칠 남매를 위하다 휘어진 활이건만 세월 탓으로만 돌리신다. 엄마가 자식을 위해 활처럼 휘어지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는 지금, 나도 활이 되어가고 있음을 안다. 올봄, 아들은 같은 길을 가는 아내를 얻었다. 아들 내외도 머지않아 그들의 화살을 위한 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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