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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예보는 올해도 헛물을 켜고 있다. 매섭다던 올 겨울 추위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일까. 주말마다 겨울답지 않은 따뜻한 바람이 분다. 어디론가 떠나도록 만든다. 겨울바다.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길게 늘어선 눈이 시리도록 푸른 겨울 바다가 기다린다. 대양을 향해 탁 트인 바다에 일상을 내려놓고, 새해 설계를 해 보아도 괜찮겠다.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울주군 서생, 경주 읍천 바닷가 마을을 다녀왔다.

▲ 경주시 양남면 읍천 '파도소리길'에서 본 주상절리. 지구 역사의 신비를 간직하며, 동해바다의 커다란 꽃으로 피어있는 부채꼴 모양의 주상절리가 여행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서생바다의 백미 '간절곶'
울산 울주군 서생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부담스럽다. 청량면 덕하를 지나 공단을 관통하거나, 온양 쪽으로 간 뒤 서생으로 가는 길 모두 어렵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작은 어려움 뒤에 만나는 서생 바다가 더 아름다울지도 모르겠다.
 서생 바다의 백미는 간절곶이다. 주변에 비해 유독 동쪽으로 삐죽 튀어나온 탓에 대송리 간절곶은 우리나라에서 태양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태양이 가장 먼저 뜬다는 상징적 의미 때문에 간절곶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올 갑오년 첫 태양을 보기위해 무려 12만명의 인파가 다녀갔다고 한다.


 지난 주말에도 간절곶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람들은 군더더기 없이 시원하게 열린 바다와 해안의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절절한 소망 하나씩 가슴에 아로 새기고 있었다.
 바다로 나간 배들의 무사함을 바라며 언덕 꼭대기에 서 있는 하얀 등대와 커다란 빨간색 커다란 우체통은 한편의 그림이 된다. 우체통에서 펜을 들고 '받으시는 분'을 머릿속에서 찾고, 그려 본다. 하지만 그리운 사람이 떠오르자 가슴이 먹먹해져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다.
 간절곶 북쪽에는 음식점으로 활용되고 있는 드라마하우스가 자리하고 있다. 드라마 탓인지 이곳을 찾는 이들도 많다. 굳이 음식을 주문하지 않더라도 이국풍의 낯선 저택 안으로 들어가 준비된 세트에서 사진촬영을 할 수 있다. 잠시나마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되어 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된다.
 

▲ 울주군 서생 진하 강양포구를 가로지르는 인도교인 명선교.
#모세의 기적 '명선도'
간절곶 북쪽 진하해변의 명선도에도 사람들이 붐빈다. 새로 건설된 명선교 좌우로 바닷물이 X자로 밀려드는 모습, 명선도와 바다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다. 명선교에는 곧바로 상판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다.
 다리를 걷는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가운데 쯤 마련된 전망대에 서니 동해바다가 눈앞을 가득 채운다. 쉼 없이 부는 바람, 쉼 없이 일렁이는 파도. 두 팔을 펴고 그들을 맞는다. 이것쯤은 이길 수 있다는 뜬금없는 용기가 생긴다.


 지금 명선도는 '모세의 기적'을 준비하고 있다. 아직 섬과 완전히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바닷물이 빠지면서 섬은 손에 닿을 듯 지척이다. 몇 번의 날갯짓만으로 오가는 겨울 갈매기들이 부럽기만 하다.
 출출한 해거름에 서생 나하리 허름한 횟집을 찾았다. 멀리 원자력발전소와 수많은 송전탑사이로 해가 걸렸다. 바다가 온통 붉은 빛으로 변했다. '와~'하는 탄성이 절로 났다. 일출의 명소에서 화려한 일몰을 만났다. 서생 바다는 탄생과 소멸의 가장 극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줬다.

 

▲ 읍천항 파도소리길의 명물 '느린 우체통'
#천년의 역사 지닌 경주 '읍천항'
전날, 무룡터널을 지나 시원하게 뚫린 국도를 따라 읍천항으로 향했다. '읍천항 갤러리'. 주차장에 도착하니 고릴라에 입을 맞추는 듯 한 어여쁜 소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옆에는 '0408'번 열차다. 기관사가 내민 손을 잡으니 '찰칵' 누군가가 카메라를 누른다. 그 찰나의 순간 먼 과거로, 혹은 먼 미래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맞은편 담벼락은 바닷속이다. 벌거벗은 어린아이가 물고기와 헤엄치고 고래가 유영한다. 갈매기가 날고, 해녀가 뭍으로 오르고, 잠수부가 다가오고, 아이가 그네를 타고, 고등어가 접시 위에 눕고, 배가 항해를 하고, 나비가 난다. 마을 전체가 들썩인다.
 남쪽으로 향했다. 잘 조성된 공원에 오징어가 겨울바람을 알몸으로 맞고 있다. 덕장(?) 근처 조그마한 간이 상점에는 험상궂은 할머니가 오래된 의자에 앉아 졸고 있다. '피데기 판매' 문구가 붙어있는 상점 풍경도 언뜻 보면 그림인 줄 알겠다.


 1종 항구인 경주 양남면 읍천항은 신라시대부터 어업이 성했다고 한다. 천년이 넘은 마을인 것이다. 쇠퇴한 마을에 활기가 돈 것은 몇 년 전부터 벽화거리가 조성되면서 부터다. 인근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읍천항이 전국적인 유명세를 탄 것은 동해의 꽃이라 불리는 부채꼴 주상절리 때문이다. 지난 2009년 군부대가 철수하면서 해안 경계지대에 무더기로 있던 주상절리가 일반에게 공개되면서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최근에는 해양경관조망벨트 사업에 선정되면서 마을에는 공원이 생기고 벤치가 놓이고, 경관등이 켜지고 벽화는 더욱 늘었으며 바닷가에는 '파도소리길'이 열렸다.
 

▲ 경주 읍천항공원 주차장에 그려진 벽화.
#'파도소리길'
'파도소리길'은 읍천항의 남쪽 가장자리 읍천항공원에서 시작된다. 배 한척이 둔덕에 놓여 있다. 배를 지나 나무 계단을 오르고, 해송 사이의 흙길을 걷고, 출렁다리를 건넌다. 소나무 사이를 비집고 바위에 매달린 수두룩한 펜션들을 지나친다. 모래주머니를 쌓아 만든 초소를 지나면 작은 전망대다. 전망대의 포토 존에는 빨간 우체통이 서있다.
 간절곶 우체통과 달리 작고 아담하다. 엽서가 없다. 젊은 연인 한 쌍이 바다를 향해 등을 돌린 채 어깨를 서로 감싸고 있다. 엽서가 없어도 그들의 마음은 서로에게 전해지겠지? 나도 누군가에게 마음으로 편지를 쓴 후, 우체통에 넣는 시늉을 했다. 


 나무데크길을 걷는 내내 바다는 지척이고, 파도는 잔잔하다. 또 다른 전망대에서 사람들이 목을 길게 빼고 무엇인가 내려다본다. 동해의 꽃, 부채꼴 주상절리다. 기울어진 것, 누워있는 것, 위로 솟은 것,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다. 거센 파도가 바위 위에 올랐다가 흰 포말을 남기고 간다. 꽃이다. 겨울바다는 그렇게 각진 바위 위에 수없이 많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주상절리를 돌아서 나오는 길, 자갈 해변으로 내려서자 파도가 자글자글 소리를 낸다. 눈을 감고 바람과 파도와 수많은 돌이 엮어내는 새해 첫 주말 오케스트라에 취한다. 비로소 마음에 가득한 짐 하나를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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