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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협동조합에 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강사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소규모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모여 협동조합을 만들고 필요한 물품을 공동 구매하고 공동의 브랜드를 개발해 공동 판매하기로 한 실제 사례. 그들이 모여 맨 처음 구매한 물품은 무엇일까? 원단? 실? 단추? 놀랍게도 봉제공장 사장(이라 쓰고 근로자겸이라고 읽는다)들이 모여 처음으로 구매한 물품은 커피믹스라고 한다.

    좁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 불편한 자세로 일해야만 하는 근로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것이 커피믹스이다. 근로자들은 짬을 내서 달달한 커피 한 잔을 마심으로써 몰려오는 잠을 쫓고 어깨에 내려앉는 피곤을 떨쳐내는 것이다. 카페인에 든 각성 효과 때문에 커피가 처음에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보급됐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흔히 다방커피라고도 불리는 커피믹스는 70년대 말 동서식품에서 처음으로 만들었다. 커피믹스의 등장은 커피 산업 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원래 커피는 손이 많이 가는 음료이다. 커피콩을 볶고, 분쇄기로 간 다음 데운 물을 붓고 거름종이로 거르는 과정을 거쳐야 한 잔의 커피를 마실 수 있다. 1900년대엔 추출한 원액을 농축한 뒤 향을 첨가하고 건조시킨 인스턴트 커피가 개발됐는데, 6·25 전쟁 때 주한미군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커피 대중화를 부추겼다. 뜨거운 물에 인스턴트 커피, 설탕, 프림을 넣어 내놓는 것이 다방커피이다. 회사 경리사원이 주로 하는 일도 출근한 사원이나 손님에게 커피를 타서 대접하는 일이었다.

 인스턴트 커피가 보급되면서 커피를 '탄다'라는 표현을 쓰게 됐지만 커피, 설탕, 프림 비율을 적당히 맞추는 일은 다소 섬세한 손길이 요구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비율에 따라 커피 맛은 미묘하게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합쳐진 커피믹스가 개발된 것이다. 인스턴트 커피의 개발만 해도 혁신적이었는데 이젠 그보다 더 빠르게, 간편하게 커피를 즐기게 됐다. 그리고 믹스의 탄생은 바로 커피 맛의 평등을 가져온 것이다.

 커피믹스가 나오면서 남성도 스스로 손쉽게 커피를 탈 수 있게 됐다. 종이컵에 커피믹스를 넣고 물을 부은 다음 저어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더 이상 미스 김의 손길을 요구할 명분이 없게 된 것이다. 커피믹스는 이처럼 맛의 평등과 아울러 성의 평등도 가져왔다. 아마 양성평등을 이루는 데 가장 큰 수훈감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커피믹스로 인해 누구나 커피를 즐기게 되면서 커피 자제의 평등이 깨지게 된 것은 아이러니다. 커피의 계급화라고나 할까. 커피의 카페인은 중독성이 강하다. 커피믹스로 커피의 맛을 알게 된 사람들은 때마침 멋진 간판을 걸고 들어선 커피전문점으로 발길을 돌려 에스프레소니, 카푸치노니, 카페오레니 하면서 바리스타가 '로스팅'해 '내려'주는 고급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커피믹스의 프림이 기름과 유화제로 만들어져 몸에 좋지 않다니, 직접 커피를 내려 마시기 위해 집집마다 에스프레소 머신이니 커피분쇄기니 하며 커피 기계를 들여놓게 되었다. 커피전문점 개업을 목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맛있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바리스타 자격증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늘어났다.

 하긴 커튼 사이로 비치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모닝커피를 즐기거나, 나른한 오후에 티타임을 가지며 한가하게 수다를 떠는 것은 누구나의 바람일 것이다. 우울할 땐 별다방에 가서 하트표가 선명한 바닐라 라떼를, 몸이 찌푸둥하면 콩다방에서 초콜릿을 넣어 달콤하게 만든 카페 모카를 주문한다. 노트북을 펼쳐놓고 리포트를 쓰거나 '~에 미쳐라'는 제목의 자기계발서를 읽기도하고, 가끔씩 사향고양이 배설물에서 나온 커피콩으로 만든, 세상에서 가장 비싸다는 루왁커피를 음미하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누군가는 종이컵에 커피믹스를 타서 급하게 마시고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작업장으로 들어선다.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처럼 '눅눅한 비닐 장판' 위에서 눅눅한 수험서를 펴놓고 미지근한 커피를 마신다. 졸음을 쫓기 위해선 두 개를 한꺼번에 타서 마신다. 가능하면 진하게, 달달하게. 커피가 아닌 카페인을 마신다. 아니, 삼킨다, 쏟아 붓는다. 입 안을 달달하게 지나 허기진 위벽을 쓰디쓰게 긁어대는 한 잔의 믹스커피를. 커피믹스의 평등한 불평등, 혹은 불평등한 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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