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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광천을 가르는 강송교 인근 소공원에 세워진 오영수 갯마을 문학비.

#울산 출신 소설가 오영수 대표작
'서(西)로 멀리 기차 소리를 바람결에 들으며, 어쩌면 동해 파도가 돌각담 밑을 찰싹대는 H라는 조그만 갯마을이 있다'
 난계 오영수 선생의 대표작인 '갯마을'의 첫 문장이다. 기장군 일광면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동해남부선 일광역에서 동쪽 바다 쪽으로 가면 일광해수욕장이다. 이 곳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해안 길을 따라가면 정말로 조그만 포구가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학리마을이다.
 

일광해수욕장 남쪽 해안가에 들어선
멸치잡이 어선들로 가득한 작은 마을
소설 속 돌담과 초가집은 사라졌지만
발길따라 문학과 역사가 묻어나는 곳



 학리마을은 '갯마을'에서 언급되는 H리로 추정된다. 언양에서 태어난 오영수(1914~1979)는 1943년부터 일광에 살았다. 일제징용을 면하려고 일광면사무소 임시직으로 근무했다. 부인도 여기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고 한다.
 '더깨더깨 굴딱지가 붙은 모 없는 돌로 담을 쌓고, 낡은 삿갓 모양 옹기종기 엎딘 초가가 스무 집 될까말까? 조그마한 멸치 후리막이 있고, 미역으로 이름이 있으나, 이 마을 사내들은 대부분 철 따라 원양출어(遠洋出漁)에 품팔이를 나간다'
 하지만 학리에는 지금 '돌담과 초가집'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스무 집 될까말까 했던 초가는 기와나 슬레트 지붕을 올려 흔적도 찾을 길 없고, 해안길을 따라서는 횟집 간판을 단 양옥집이 줄줄이 들어섰다. '조그만 멸치 후리막' 이 있던 곳은 멸치잡이 어선들이 가득한 항구로 변했다. 항구로 밀려오는 큰 파도는 긴 방파제가 막고 있다.


 

▲ 학리 방파제에서 바라본 학리마을 풍경. 소설 속 초가와 멸치 후리막은 찾을 길 없다.
바람이 찬 포구 노천에 한 무리의 주민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다. 가까이 가보니 빠른 손놀림으로 낚싯줄과 바늘을 손본다. 장어 주낙이다. 줄을 둥근 뿔 통에 둘둘 담고, 바늘은 통 테두리에 촘촘하게 꽂고 있다. 바늘에는 장어를 유혹할 꽁치가 달렸다.
 "많이 잡히느냐"고 물었는데, 일흔을 넘긴 어부는 한숨으로 먼저 답을 한다.
 "근처에는 고기가 없어 일본 쪽까지 멀리 나가야는데, 기름 값과 노임이 너무 많이 들어 옛날처럼 재미가 없어"
 노인의 바람처럼 장어들이 바늘을 덥석덥석 물면 좋으련만, 사박오일의 경우 여섯 일곱 명이 배를 타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700만원 정도. 여기에다 선주와 선원 몫이 나가 엔간히 잡아서는 수지가 맞아떨어지지 않는단다.

#마을 지킴이 수백년 된 당수나무
포구에서 일하는 주민들을 뒤로하고 굴딱지가 붙은 돌로 쌓은 담을 찾았지만,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몇 백 년은 됨직한 고목 두 그루에 마음이 빼앗긴 건 순식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오르는 길을 찾는데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다. 가파르고 좁은 골목길을 겨우 찾아 오르니 표구나무와 소나무가 텃 밭에 아무렇게나 서있다. 소나무는 마을의 이력을 말하려는 듯 둥치에 사람 입 모양의 생채기 같은 것이 있다. 오래된 나무들이 들려주는 마을의 이야기를 담으려고 카메라를 꺼냈다. 고목 너머 멀리 달음산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지만 온전하지 않다. 바닷가 쪽의 콘크리트 건물과 전선을 가득 진 전봇대가 시야를 가린다. 방향을 돌려 바다를 담으려해도 방파제가 버티고 있어 역부족이다.


▲ 학리 마을의 당목 중 하나인 오래된 표구나무.
 아쉬운 마음으로 골목길을 다시 내려오다 할머니 한 분과 마주쳤다. '금단의 땅'을 밟은 것을 들킨 양 당혹스런 마음으로 "나무가 참 좋네요?"라고 말을 건넸다.
 "우리 마을 당수나무 아인교. 내가 시집올 때도 저리 컸으니, 아마 수백 살을 됐을 깁니더"
 할머니는 묻지도 않았는데 14일부터 이곳에서 풍어제를 지낸다고 일러 주었다.
 학리 방파제 끝에는 밋밋한 하얀색 등대가 있다. 강태공 몇 명이 칼바람을 맞으며 방파제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 옷깃을 세우고 등대 쪽으로 가니 젖무덤에 봉긋 올라온 유두 모양의 달음산(기장8경 가운데 제1경인 명산)이 눈 속으로 그대로 들어온다. 이곳에서야 '산 마루에 초아흐레 달이 걸렸다'고 묘사한 소설 속 달음산의 모습이 온전하게 보인다.

#소설 속 해순이도 돌아오게 한 아름다운 곳
멀리 보이는 일광해수욕장에 비하면 학리 포구는 정말 작고 보잘 것 없다.
 하지만 소설 속 학리포구는 주인공 해순이가 남편을 잃은 후 재가해 산골로 갔어도 잊지 못해 30리길을 한 걸음에 도망쳐 돌아올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발가락을 간지럽히는 모래가 지천으로 깔렸고, 해순이를 비롯한 해녀들이 물질을 할 만한 돌무더기가 사방으로 깔린 곳이었다. 멸치 후리막에서 꽹과리 소리가 들리면 그물에 걸린 멸치떼를 후리기 위해 마을 사람이 모두 모였다. 후리꾼들의 '데야 데야 데야 데야'하는 소리가 신명나게 들리는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세월은 무섭다. 사람도 바꾸고 풍경도 바뀌었다. 학리마을을 지키고 있는 저 소나무와 달음산 봉우리는 옛 일들을 기억할까?

#학리 산책길 따라 걷는 재미도
학리마을을 빠져 나오는 길에 최근에 만든 '해안산책길'을 걸었다. 몽돌에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바다의 잔물결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해안길을 따라 일광해수욕장을 낀 삼성마을로 들어서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샘물이 솟아 흐르는 것으로 알려진 해변의 샘물 '삼성대'의 흔적이 눈에 띈다.
 지금은 도로확장으로 인해 흔적만 유지하고 있다. 삼성대라고 불리게 된 것은 이 곳 유람한 고려 말 정몽주 이색 이숭인 등 3명의 성인이 경치에 흠뻑 빠져서 그렇게 불리게 됐다고 전래되고 있다. 삼성대 앞에는 고산 윤선도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 일광해수욕장 전경.
 북쪽으로 백사장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강송교를 건너기 전 별님공원에 화강암으로 만든 비가 눈에 들어온다. 학리마을을 배경으로 쓴 소설인 '갯마을'의 저자 난계 오영수의 문학비다.
 '오영수의 '갯마을'의 현장'이란 표지석이 기장문인협회 이름으로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학리가 아닌 이곳이 왜 갯마을의 현장인지는 논란이 많다. 일부에서는 영화 '갯마을'의 촬영지일 뿐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표지석 앞 방파제 위에서 일광해수욕장을 보니 동그랗게 반원을 그리고 있는 모양이 아직 숫기 가시지 않은 처녀의 엉덩이 한 쪽을 닮았다. 콘크리트로 뒤덮힌 학리 포구에서는 보지 못한 백사장이 깔려있다.
 '맨발에 식은 모래가 해순이의 오장육부를 간지럽도록 시원하도록' 해 준, 바로 그 백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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