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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요즘처럼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는 아이들이 어떻게 약속을 잡고 놀았나요?"라는 질문이 올라온 적이 있다. 그에 대한 답글이 세대에 따라 달라서 흥미롭다. 집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누구누구 바꿔주세요 하고 약속을 잡는다. 가까운 친구네에 들러 그 애랑 같이 다른 집을 돌며 애들을 모은다. 그리고 또 다른 답글. 공터에 가면 따로 약속을 하지 않더라도 놀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 때도 그랬다. 공터에 가면 늘 아이들이 있었다. 설령 조금 일찍 도착해 아무도 없더라도 금세 누군가 나타났고, 공터는 이내 시끄럽고 활기에 넘치게 된다. 공터는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그 당시 우리에게 제대로 된 장난감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구슬이나 딱지면 훌륭한 장난감이고, 대개는 돌이나 사금파리, 막대기 같은 걸 갖고 놀았다. 땅 위에 바둑판무늬 금을 긋고 돌을 이리저리 차서 옮기는 사방치기나, 막대기를 쳐낸 다음 얼마나 멀리 갔는지 길이를 재는 자치기, 오징어나 팔자모양을 그려놓고 술래의 저지를 뿌리치면서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통과하는 오징어가이상, 팔자가이상 등을 했다.(이 놀이는 지방마다 이름이 다른데, '가이상'은 전투를 뜻하는 일본말 '가이센'에서 나왔다고 한다.)

 물론 공터가 온전히 아이들만의 영역은 아니었다. 추수철이 되면 타작마당이 되기도 하고, 타작이 끝나면 멍석 위에 참깨나 콩, 고추 따위를 널어 말리는 건조장의 역할도 했다. 그러면 우리는 공터 대신 가을걷이가 끝난 빈 밭으로 몰려다니거나 뒷산에 올라가 도토리나 상수리를 줍고 양지바른 묏등 잔디에서 미끄럼을 탔다. 그러다 겨울이 다가와 다시 공터가 비게 되면 거기서 연살을 다듬고 팽이를 깎는 것이다.

 어린 시절, 공터는 마치 보자기 같았다. 묶으면 보퉁이가 되었다가 풀면 밥상을 덮는 상보가 되고, 앞치마도 되고, 목도리 수건도 되는 보자기처럼, 공터는 다양한 쓰임새를 가졌다. 누구네 집에 초상이 나면 공터에 꽃상여를 부리기도 했고, 이발사나 땜장이, 엿장수가 오면 공터에 짐을 내려놓고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장에 가는 어른들의 집결지도 공터였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공터는 아이들의 공간이고 놀이의 공간이다. 우리는 책가방을 마루에 던져놓거나 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공터로 향하곤 했다. 그리고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며 들판 끝에서부터 어둠살이 밀려오고, 서쪽 하늘에 개밥바라기별이 희미하게 떠오를 때까지 뛰고 달리고 구르곤 했던 것이다.

 16세기 네덜란드 화가인 피터 브뤼겔의 <아이들의 놀이>란 그림을 보게 된 것은 훨씬 훗날의 일이지만, 거기에 나오는 공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놀이가 우리가 놀던 것과 비슷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신데렐라>와 비슷한 전래동화가 세계 도처에서 수집되어 인류의 보편적인 정서의 한 단초를 말해주듯, 아이들의 놀이도 어떤 세계적 보편성을 띄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육학년이 되고 사춘기가 되면서 공터에 발길이 점점 뜸해지다가 중학생이 되어 버스를 타고 다니게 되면서 더 이상 공터를 찾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가끔씩 들르게 되는 고향마을에 공터는 더 이상 없다. 높은 담을 두른 철제 대문의 주택들과 일층에 주차장을 둔 빌라들이 들어섰다. 알록달록한 시소와 미끄럼틀을 갖춘 놀이터가 있지만 뛰어노는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 많던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구슬치기를 하고 땅따먹기를 하고 술래잡기를 하던 아이들은. 하루 종일 놀고도 무언가 아쉬워, 달이 밝은 날엔 다시 밤중에 공터로 모여들어 그림자 밟기를 하던 아이들은.

 언젠가 육십 대 할아버지가 학교 유리창을 깨고 다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어린 시절에 해보지 못하고 억압되어 있던 것이, 나이가 들어 금기가 느슨해 진 틈을 타 밖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한다. 호이징하는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란 표현으로 놀이가 인간 고유의 본능임을 주장하였다. 충분히 놀지 못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어떤 행동을 보일까.

 농반진반으로, 남편이 요즘 아이들의 놀이 문화 실종에 대한 대책을 내놓은 적이 있다. 전래놀이를 교과목으로 채택하고 시험을 보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놀이가 곧 공부가 되겠지. 아마 그러면 놀이 학원이나 과외가 성행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씁쓸해했다. 하긴, 문화란 변화해가는 것이고, 굳이 아이들에게 전래놀이를 고집할 이유도 없다. 스마트 폰 게임도 훗날엔 이 시대의 놀이문화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가끔씩 아이들에게 이렇게 속삭여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심심하고 쓸쓸하니? 공터에 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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