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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비손님이 다녀가셨다. 가뭄 끝이라 텃밭에는 더없이 반가운 단비다. 며칠 전 고구마며 고추 모종을 내놓고 시들시들 말라가던 것에 애가 타던 차였다. 바짝 마른 흙이 불만이던 고것들은 내가 조리로 길어다 준 물로는 시큰둥하더니 잠시 하늘이 내린 물에는 금방 고개를 번쩍 들고 '야, 살았다~'며 기분 좋게 일어섰다. 자연은 때에 맞추어 스스로 조절한다는 사실에 고개가 숙여진다.

 하늘의 도움 없이는 얼마 안 되는 밭농사도 여간 힘들지가 않다. 수시로 햇볕과 물이며 바람친구가 의좋게 들락거려야 결과물을 얻는 것이 밭농사다. 어쭙잖은 푸성귀 한 줌도 하늘이 돕지 않으면 부질없는 손장난에 그치고 만다. 하늘과 땅이 절실한 관계인 것을 농사를 지어보면 절감한다.

 우리는 흔히 '하늘과 땅 차이'라는 말을 크게 동떨어진 의미로 쓰고 있다. 옛 어른들은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며 남녀의 차이를 극명하게 구분 짓기도 했는데 실은 가장 가까운 사이다. 현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은 어느 쪽이 하늘이고 땅이건 간에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남녀가 같이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데는 서로 하늘과 땅 같은 존재여야 할 터다. 만일 하늘이 남자이고 땅이 여자라면, 땅은 하늘이 떨어뜨린 것을 키우는 존재이다. 하늘은 땅을 위해 식량을 찾아 나서야 하고, 땅은 늘 바쁘게 주위를 맴돌며 자식을 거둔다.

 땅과 하늘은 서로 거들고 기쁨도 같이 누린다. 땅이 없으면 어떻게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것이며 하늘은 또 무엇을 위해 물과 햇볕을 내릴 것인가 말이다. 서로가 하늘 아니면 땅인 존재여서 어느 한 쪽만 소홀해도 농사는 망치기 일쑤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삶은 한통속이다.

 흙은 빈 땅으로 그냥 두기를 싫어한다. 온갖 잡풀을 밀어 올리며 주인의 손길을 원한다. 잠시만 소홀해도 땅은 잡풀로 난장판을 치며 농사를 방해하려 든다. 농부가 밭에서 무릎 꿇는 시간이 길수록 더 좋은 먹을거리를 주는 것이 흙이다. 요령을 피우거나 건성으로 대하면 절대 제대로 된 결과물을 주지 않는다.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은 농사를 지어보면 안다.

 내 텃밭에는 꽃이 절반이다. 채소나 열매를 얻는 것 말고 머리와 가슴을 데우고 아름다움을 채우는 것에도 의미를 두려고 한다. 이익을 얻어 육신의 배를 불리는 것만 농사라 고집하지는 않겠다. 심성 고운 꽃 문에다 속내를 건네며 평안을 얻는 것이 어찌 육신의 배부름에 비할까.

 꽃이 좋은 요즈음은 밭에서 얼쩡거리는 시간이 늘어난다. 지난해 가을 파종한 동초는 겨우내 나물로 즐겼고 여태껏 노란 유채꽃으로 벌 나비를 불러 모으고 있다. 집 베란다에서는 시들어가던 영산홍이 여기서는 무더기로 연분홍색 꽃 봉분을 만들었다. 자생으로 씨를 떨어뜨린 봉숭아는 여기저기서 나울거린다. 말이 드문 대파는 입이 불룩하도록 별 밥을 머금어 금방이라도 '뻥' 폭죽소리와 함께 하늘에다 쏘아 올릴 시늉이다.

 텃밭에 핀 꽃에는 한결 생기와 여유가 더하다. 자유로운 삶이 인생의 본래 모습이듯 고향 흙을 만나 제대로 꽃 문을 열 때 완전한 꽃으로 보인다. 텃밭에 핀 꽃은 나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산책 나온 까치가 깨금발로 다가와 '까각까각' 눈치를 보며 주변을 알짱거린다. 미물이라고 어찌 꽃이 좋지 않으랴. 내 행색이 그리 거칠어 보이지가 않은지 발뒤꿈치에 긴장을 풀고 있는 것은 곁눈질로 알아차린다. 사람이든 미물이든 감정은 서로 상대적일 게다. 이런 텃밭의 재미가 있는 한 내 삶은 절대로 심심치가 않다.

 텃밭채소가 주인을 닮았다. 잡풀을 매고 나면 설렁설렁 엉덩이를 흔드는 기분파이다. 삐딱해진 고춧대 허리를 거드는 내게 난데없이 아기손가락보다 가는 고추를 살짝 꺼내 보이며 짓궂은 장난을 걸 적에는 피식 웃음이 난다. 과분한 보상은 바라지 않는다. 아름다운 생명인 꽃을 키운다는 생각이 커서 수확을 얻는 것은 덤이다. 살다가 우울을 참기가 힘든 날은 텃밭에 가면 마음속에 잔잔한 평화가 찾아든다. 그들과 잔잔한 교감을 나누고 있을라치면 이처럼 순하고 순수한 빛이 주는 지혜로움이 또 있을까 싶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작은 것에도 속내를 드러내고 참지 않으려고 한다. 하는 일이 성에 차지 않아하며 불만과 투정을 늘어놓는다. 인간으로써 지켜야할 당연한 법과 규칙, 도리와 양심까지 한꺼번에 무시하기 일쑤이니 어쩌랴. 부끄럽기가 그지없다. 해마다 원하는 만큼은 주는 텃밭이다. 때에 맞춰 하늘이 돕고 땅이 거둔 결과물이다. 곧 닥칠 한더위를 이기고 서늘한 기운이 기별해 올쯤이면 텃밭이나 내 마음 밭에도 한결 풍성함이 찾아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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