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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여년 전과 같이 변함없는 모습의 현재 호계역.
'간이역(簡易驛)'. 이용하는 사람이 적어 효율성이 낮아 일반역에 비해 규모가 작은 역이다. 울산에도 간이역이 있다. 그 중 울산의 1호 간이역인 호계역은 1922년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해 100년의 역사를 가까이 하고 있다. 1세기라는 지긋한 나이를 가졌음에도 덩치가 큰 일반역에 가려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기자 역시 좀 더 편한 것을 선호하기에 기차를 이용하면 자연스럽게 일반역인 태화강역을 찾곤 했다. KTX역이 생기고나서는 더욱 그랬다. 주변이 어수선해 어지럼증이 끊이질 않던 날들, 문득 호계역을 찾아가보고 싶어졌다.


# 작은 대기실안 소소한 행복
호계역을 처음 가보는 사람에게 역을 찾아보라고 한다면 헤맬 수도 있겠다 싶었다. 좁은 2차선도로 주변으로 형성된 호계시장에서 골목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호계역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방향을 돌리면 역이 있다는 친절한 안내판이 있지만 주변을 깊이 기울이지 않으면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구경삼아 전통시장을 둘러보며 역을 찾아간다면 헤매는 길이 짜증스럽지만은 않다. 특히 호계장이 열리는 1, 6일에 맞춰 역을 이용하면 북적거리면서도 인정이 넘치는 전통시장을 만날 수 있다. 대규모의 장은 아니지만 북구지역의 대표 시장인 만큼 지역 농산물을 구매하고, 시장에서만 가능한 가격 깎기의 재미도 볼 수 있을 것이다.

▲ 1970년대 호계역.
 평일이지만 호계역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매표소와 1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작은 승객대기실. 멋스럽게 중절모를 쓰신 어르신은 신문을 읽고, 검은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대생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기차를 기다린다. 부모님과 함께 기차 여행을 떠나는 3~4살 돼 보이는 꼬마의 웃음도 들린다. 작은 호계역 대기실에서 발견한 소소한 행복이다.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가 다 되어갔다. 어디로 가는 기차를 타볼까 고민하다 포항행으로 선택했다. 오전 11시 10분에 출발해 12시 12분 포항역에 도착하는 무궁화호 1944편이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1시간은 지루하지도 아쉬울 것도 없을 것 같았다.
 대기실에서 플랫폼까지의 거리도 꽤나 가까워 늘 기차역에서 해당 플랫폼을 찾아 헤매는 기자에게는 간이역이 더없이 좋았다. 대기실에서 나가면 플랫폼이 있으니 기차가 오는 소리도 바로 들린다. 간이역에서 타는 기차는 여행자의 감성을 더욱 촉촉하게 만든다.


 이날 탄 기차는 포항역이 종착역이었다.

▲ 1970년대 호계역 철도.

 동해남부선 복선화 사업으로 수년뒤면 사라질 동해남부선 호계역에서 마지막 역까지 여행하는 상상을 하곤 했는데, 이번 여행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포항역이 동해남부선의 끝은 아니지만 말이다.
 기차를 타고 자리에 앉아 10분 동안은 설렘에 친구와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 기대에 찬 여행자의 모습과 차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호계역에서 기차를 타면 농촌과 도시의 모습을 동시에 구경할 수 있다.
 사진을 찍고나서는 사색에 빠졌다. 승객들도 창밖을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하는 모습이다. 늘 자동차를 타고 직접 운전해 이동을 해오다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기차를 타니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이 주어진 듯 하다.

# 종착역 포항역 인근서 즐기는 여유로움
오후 12시 12분. 포항역에 도착했다. 낯선 곳에 왔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여행자의 얼굴을 할 때다. 역 앞 관광안내소에서 지도를 한 장 건네 받아 목적지를 정했다. 아침을 먹지 않은 탓인지 허기가 져 우선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포항의 명물인 물회로 선택했고, 첫 번째 목적지는 영일대해수욕장(구 북부해수욕장)으로 정했다.


 포스코 전경이 펼쳐지는 해변은 산책하기에 좋다. 최근에는 바다 전망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정자가 생겨 쉬어가기도 적당했다. 지난해 여름 이 곳을 찾았을 때도 정자가 조성돼 있었지만 갑자기 비가 쏟아져버리는 바람에 멀리서 구경만 하고 돌아와 아쉬웠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가볼 수 있게 됐다.
 해수욕장 근처 횟집에 들어가 물회 한그릇 뚝딱 해치운 뒤 정자를 찾았다. 울산에서 늘 맞는 바닷바람이지만, 바람소리와 바다냄새는 그 지역마다 다르다. 여유로움을 찾으러 왔기 때문인지 살갗을 스치는 바람 기운이 가볍고 시원했다.


▲ 포항역 광장.
 다음 목적지를 찾아 지도를 다시 펼쳤다. 포항에 온 만큼 관광지를 가고 싶었는데, 올해 1월 포항에 운하가 한 곳 생겼단다.
 지도상 포항역과 가까이에 있는 것 같아 다시 포항역으로 돌아갔다. 버스를 탈까 생각했지만 날씨도 선선하겠다 걸어가기로 했다.
 포항역에서 30분 정도 걸으니 포항운하에 도착했다. 걸어가기엔 약간은 먼 거리라며 뒤늦게 후회를 했지만 이왕 정했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걸었다.
 포항운하는 포항 송도동과 죽도1동 사이 동빈대교에서 형산강을 남북방향으로 잇는 지역이다. 동빈내항과 형산강 사이의 구간은 1970년대 도시화과정으로 매립 후 주거지역으로 변했다. 포항시는 시민들에게 잊혀진 항구와 친수공간을 돌려주고자 포항운하라는 유원지를 조성했다.


 1.3km 구간의 운하는 울산의 태화강대공원처럼 물가를 끼고 걸을 수 있어서 산책로로도 일품이다.
 운하 일대를 구경하다 보니 시계바늘이 벌써 4시에 가까워졌다. 포항에서 호계역으로 돌아가는 기차는 오후 4시 13분 뿐이기에 서둘러야 했다. 버스를 타고 다시 역으로 돌아갔다. 늦은 오후 시간에도 역에는 이동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큰 일을

▲ 포항 영일대 해수욕장.
벌인 것도 아닌데 몸이 무겁다. 눈을 감고 호계역에서부터 포항역까지 오늘 하루치 여행을 되돌아본다.
 문득 전날밤 라디오에서 들었던 DJ의 멘트가 생각났다. '영화의 주연이 아니더라도 꿈 꿀 권리는 있다' 호계역도 그랬다.
 작은 간이역에 불과하지만 꾸준히 이용되고 있는 호계역 역시, 다른 역만큼 꿈꾸고 빛날 권리가 있다. 우리 모두에게도 꿈 꿀 권리가 있다.
 수년 뒤에는 사라지겠지만 호계역의 남은 나날들에도, 앞으로 우리들의 매일에도 희망이 그려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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