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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선생은 '글쓰기 교육의 이론과 실제'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쓰게 하는 목적은 아이들의 삶을 참되게 가꾸어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하는데 있다. 목적은 삶을 가꾸는데 있으며, 글을 쓰는 것은 이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된다"고 했다.
20년 전, 나는 이 말을 가슴에 담고 아이들 글쓰기 교육에 뛰어 들었다. 비록 학교 밖 글쓰기 교육이지만 아이들과의 만남은 내 삶의 활력소였고 내가 사는 이유였다. 아이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어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기준을 세웠고 바른 세상이란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게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아이들을 통해 배웠다. 아이들이 나의 스승이 되어 나를 이끌었고 나는 점점 아이를 닮아갔다.

하지만 어른들의 기준에 맞아야 한다거나 어른들의 마음에 드는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아이들 속에 자리 잡아, 마치 착한 어린이인 것처럼 포장하는 글쓰기를 하는 아이들도 심심찮게 만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해지는데, 그 원인은 아무래도 나이가 들수록 어른들이 요구하는 것에 자신을 맞추며 사는 것이 당장 그 순간만은 편안하게 한때를 넘기기 쉽다는 것을 아이들도 아는 것이 아닐까? 즉, 어른들이 원하는 생각과 다른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드러냈을 경우, 닥쳐올 어른들의 잔소리나 걱정을 먼저 재단하여 어른들의 입맛에 맞는 글을 쓰는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가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있는 것을 없게 하는' 어른들의 잘못된 세계를 아이들이 시나브로 익혀 스스로를 거짓된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만난 한 아이가 쓴 글의 일부이다.
 "나는 5학년 1학기 때 반장이었다. 그때 나는 청소 검사를 했는데 나랑 친한 친구는 청소를 안 해도 조금만 깨끗하면 통과시켜 주고 싫은 친구는 조금만 더러워도 통과를 시켜주지 않았다. 지금은 반장이 아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에 찌꺼기가 남아 있는 것 같다."
 "1학년 때 나는 엄마의 지갑에서 돈을 훔쳤다. 문구점에서 내가 갖고 싶은 연필을 사고 먹을 것을 사 먹었다. 하지만 엄마한테 들킬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일곱 살 때 나는 껌을 훔쳤다. 나는 가슴은 두근거리고 엄마가 봤을까 걱정됐다. 나는 이 껌을 꼭 먹어 보고 싶었다. 나는 그 껌을 먹고 힘이 나 하나 더 훔쳤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내가 이 아이의 엄마나 아빠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반장이 되어 불공평한 모습을 보인 내 아이에게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아야하고, 지갑에서 돈을 훔치고 껌을 훔쳐 먹은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당장은 '이렇게 나쁜 행동을 하다니!' 생각하고 아이들에게 뭐가 잘못되었는지 앞으로는 그런 행동을 하지 말라고 나무라거나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아이들은 이 글을 쓰는 동안 이미 자신의 문제와 잘못한 일이 뭔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정화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더욱 깨끗이 비운 아이에게 어른들의 잔소리는 오히려 독이 되지는 않을까? 만약 이글을 읽고 혼을 내거나 잔소리를 늘어놓는다면 이 아이는 앞으로 이런 글을 쓰지 않고 어른들의 입맛에 맞는 글만을 쓸 가능성이 클 것이다. 착한 어린이인 것처럼 포장하는 글을 쓰고 말을 하겠지만 아이의 마음 한 구석이 막혀 있을 것이다.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임금이 벌거벗은 몸으로 거리에 나타났을 때 모든 어른들은 '임금님의 옷은 참 아름답습니다.'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며 진실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 모습을 본 아이는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라고 솔직히 말한다. 내가 만일 이 아이의 부모라면, 임금이라는 권력과 권위 앞에 굴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아이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올바를까?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진실한 세상을 아이들은 가꾸며 살아간다. 하지만 세상을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경험한 어른들의 기준에 맞게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우리 아이들을 눕히고 아이들의 생각을 재단하는 것이 아닐까?
아이들의 살아 있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아이들이 오히려 우리의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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