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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의 벽면에 담뱃갑만한 것이 붙었다. 허락 없이 더는 오지 말라는 경계표시다. 소리 내어 말을 하지 않아도 굳이 몸동작을 취하지 않아도, 그 앞에만 서면 검문을 받아야 한다.

 그래도 비밀번호 '네' 자리를 쓸 때에는 별로 틀리지 않았다. 앞집과 옆집에 도둑이 들고부터는 여덟 자로 바꾸어 놓았다. 숫자를 마치 군번같이 길게 만들고 부터는 명석하지 못한 내 머리에 혼동이 온다. 올여름 밭일을 하고 집으로 올 때였다. 숨이 턱턱 막혀 목은 갈증이 나서 급하게 숫자를 누르다 보면 틀리고 만다. 한두 번 틀리고 나면 알았던 숫자도 순서를 뒤바꿔 움찔움찔 당황하게 된다. 수학공식처럼 계산하는 것도 아닌데, 숫자가 괜히 헝클어져 나온다. 세 번을 연거푸 틀리고 나면 한참을 기다렸다가 다시 눌려야 한다. 내 집이라고 몸은 마치 삶은 보리쌀 퍼지듯이 퍼질 대로 푹 펴져서, 겉옷을 반쯤 벗은 채 어서 들어서고 싶다. 마음은 바쁘고 머리는 해 맑지 못하여 거절당하는 내 모양새가 가관이다.

 수없이 들고 나는 쳇바퀴 삶이건만 이렇게 앞면도 몰수당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 잘못은 모르고 인심한번 고약하다 싶다. 아둔한 내 기억을 꼬집어 주고 싶을 뿐이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무디어진 내문서함이 원망스럽다. 문명이 발전 할수록 편리한 점도 있지만 느슨해진 마음을 곧추세워야 살아 갈수 있는 것이 오늘날이다.

 그러고 보면 열쇠도 없고 밋밋하다. 튀어나오거나 움푹하게 들어 간데도 없는 것이 비밀을 지키는 재주가 놀랍다. 번호 키도 속을 열어보면 결코 만만하지 않으리라. 한 세상 보듬은 자세 가슴팍은 온통 거미줄 같이 얽히고설켜 있으리라. 그도 주어진 사명을 다하느라 온 신경을 바짝 세우고 있을 것이다. 의미 있는 고집은 꺾이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을 다 알면서도 그를 대하는 내 자질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인생은 끝없는 번호와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그렇기에 합당한 기억을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여기까지 왔어도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잘하기는커녕 허점으로 얼룩진 오점 투성이다. 그러나 내 삶이 되돌려져 이제부터 다시 주어진다 해도 완벽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장담은 못 하겠다. 지나간 날들보다는 좀 나을지 몰라도 후회가 없는 길이 있을까.

 세월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나날로 우리 사람들이 문명을 따라 발전하고 변천사를 거듭해 가는 중이다. 아기가 낯선 사람을 보면 낯가림을 하듯이 암호를 바로 대지 못하면 낯가림은 기본이다. 저장된 번호를 차례대로 배열하지 않고서는 마땅한 도리가 없다.

 번호 키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건전지를 교환해 달라는 알람이 있다. 에너지가 다 닳았으니 새로 바꿔 달라는 음을 보낸다. 재충전을 해야 무난하게 들고 날 수 있다는 신호다. 그런 것을 보면 번호 키는 참으로 명석하다는 생각밖에는 달리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도 건전지를 새것으로 갈아 끼우듯, 나도 내 머리에 저장된 메모리칩을 가끔씩 제 정비하여야겠다. 물에도 때가 끼듯이 내 기억에도 먼지가 끼지 않겠는가. 이제부터는 기억에 먼지나 녹이 슬지 않도록 윤이 나게 닦아야 하리라.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문 열기만이 아니다. 일상생활에 있어서 깊은 의미를 부여 하는 것이 아닐까. 컴퓨터도 정해진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열수가 있듯이, 흐리하고 멍멍한 정신은 살아가는 데에 불편하다. 마치 겨울 쥐가 배가 고플 때마다 무를 저장한 구덩이에 대중없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처럼 들쑥날쑥한 기억은 쓸모가 없다.

 어찌 보면 현 시대를 가고 있는 우리들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그물에 갇혀 이십사시를 지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가는 곳, 손닿는 곳, 어디든지 비밀번호다. 아직도 나는 자격 미달이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 또 잘못 누른 것이다. 바로 들어서지 못하고 문 앞에서 서성인다. 오늘도 불시의 검문을 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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