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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휘소탕 염혈산하(一揮掃蕩 血染山河). 한번 휘둘러 산하를 피로 물들이는 한 사내의 기개가 염천 더위를 녹여 버렸다. 바로 이순신이다. 언제나 우리에게 충(忠)의 본질을 생각하게 하는 그가 우리의 심장을 다시 뛰게하고 있다. 한국영화 흥행 기록을 줄줄이 갈아 치우고 있는 영화의 소재는 평범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익히 들어온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나서면 살 것이다(生卽死, 死卽生).'이다. 12척의 배로 330여척의 왜선을 격파한 무용담이거나 왜군을 왜놈으로 그려 조선 수군을 한없이 미화하는 소민족주의 쯤이라면 이렇게 많은 이들이 영화관에 줄을 서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영화 명량의 기록적인 흥행 돌풍에는 몇가지 다른 모습이 보인다. 영화의 상영시기가 광복절과 겹쳐 있고 세월호 참사 이후 리더십의 부재가 사회적 화두가 된 시점이어서 명량의 '민본주의'는 더욱 빛을 발하는 분위기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 개봉된 이순신 영화에는 무수한 조선인의 학살이나 잔학한 왜군의 만행이 이슈가 되지 못했다. 언제나 이순신을 소재로 한 영화의 지향점이 애국이거나 항일로 이어졌던 과거의 패턴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일본의 과거사 왜곡이거나 무도한 욕망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로 영화를 읽는 분위기다.   

 명량이 천만관객을 돌파하자 정치권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당직자들과 함께 단체 관람했다. 김 대표는 영화를 본 뒤 출입기자들과 티타임을 갖고 충무공의 리더십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인제 최고위원도 영화를 관람한 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한 지도자의 충성심과 전략이 어떻게 나라를 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는 영화평까지 내놓았다. 야당도 명량을 정치적 화두로 차용했다.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위원장은 국민공감혁신위원장을 수락하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심정도(중략) 모두 우리가 이겨야 하는 시련의 시간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며 충무공을 거론했다.

 문제는 애국애족 정신으로 충만했던 이순신 장군을 벤치마킹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청와대와 여야 모두 꽉 막힌 정국을 풀 수 있는 리더십은 실종됐다는 점이다. 말로는 충무공을 이야기하고 국민과 민생을 앞세우지만 언제나 문을 닫은 뒤에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입을 맞추기에 혈안이다. 바로 이 지점에 명량 돌풍의 이유가 있다. 전문가들은 세월호 참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지도층에 대한 불신과 오랜 불황에 따른 실망감이 이순신 열풍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최근 잇달아 화제의 중심에 선 역사적 인물들은 모두가 강력한 리더십을 중심에 두고 있다. 문제는 그 리더십의 지향점이다. 지금 광풍처럼 불고 있는 이순신의 리더십이나 얼마전 화제의 중심이 됐던 정도전의 리더십 모두는 강력한 지도력의 근본에 백성을 두고 있었다. 백성의 행복한 삶이 정치의 근간이자 지향점일 때 그 리더십은 빛을 발한다.

 세월호라는 기형적인 여객선 한척의 침몰로 2014년 대한민국은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개각도 하고 시스템 개혁도 약속했지만 여전히 침몰한 대한민국호는 운항일지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2년차에 레임덕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지지도가 바닥을 헤매는 수준이다. 대통령의 지지도가 떨어지고 정치가 푸념거리가 된 것은 대통령과 정치권, 그리고 대통령과 국민 사이의 소통구조에 고장이 났거나 구조 자체가 잘못 설정됐기 때문이다. 적폐청산을 외친 정부의 뒤통수를 그렇게 믿었던 군이 흔들고 있다. 구멍난 시스템을 땜질하다보디 여기저기서 또다른 문제들이 장독을 깨뜨리는 형국이다. 이 정도쯤이면 문제의 근본에 대한 차분한 성찰이 필요하다.

 흔히 현재의 정치적 문제를 '소통의 부재'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소통 이전에 짚어야할 점은 문제의 근본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적폐의 근원을 따지고 시스템을 바꾸지 않은채 '청산'을 외치면 본질은 몸을 움츠리거나 화들짝 도망가기 바쁘다. 사건이 터지면 현장에 달려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인 것처럼 약속하는 것이 '쇼'가 되지 않는 정치는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가능하다. 문제의 본질을 꼼꼼히 살피고 해결책을 찾아 토론과 회의를 거듭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 고민의 자리는 언제나 열려 있어야 신뢰의 싹이 자랄 수 있다. 여든 야든 상대의 목소리를 듣고 상대와 함께 문제의 본질을 풀어가는 자세가 소통의 기초가 되어야 제대로된 소통이 이뤄질 수 있다. 이런 고민의 과정을 거친 해법은 설득력을 가진다. 그래야 반대 쪽에 선 이들에게 당당할 수 있고 국민의 신뢰를 우군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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