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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대선 개입 사건' 1심 판결에 대해 원색적인 비난글이 법원 내부통신망에 올랐다. 비난글을 올린 사람은 다름 아닌 현직 부장판사였다. 제목이 거창하다. '법치주의는 죽었다'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글은 원고지 20장 분량이다. 서울중앙지법이 원 전 원장에게 공직선거법 위반은 무죄, 국정원법(정치관여)은 유죄라고 판결한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이 글에서 그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관련된 중요한 재판이 한편의 '쇼'로 전락했다. 이것은 궤변"이라고 주장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동료인 재판장에 대해 "재판장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심사를 앞두고 입신영달에 중점을 둬 사심이 가득한 판결을 내린 것"이라며 원색적으로 비꼬았다.

 그의 글은 국정원장의 대선개입이라는 중차대한 사안에 대해 법원이 정치적 판결을 했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듯하다. 하지만 행간을 읽어보면 정치적 판결이 문제가 아니라 대선개입에 무죄를 선고한 부분에 대한 격앙된 감정의 표출로 읽힌다. '판사는 오로지 판결로 이야기한다'든지, '법리와 논리에 입각한 반박이 아니라 감정적 마스터베이션'이라는 식의 이야기는 접어두자. 하기야 법원 내부에서 이정도의 말장난이 오간 일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니 그냥 넘어갈 법도 하다. 그런데 말이다. '유전무죄, 무전 유죄'라는 오래된 비아냥이 '내편 무죄, 니편 유죄'라는 식의 진영논리적 판결로 법조계에 자리 잡아가는 모양새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정확하게 두쪽으로 갈라졌다. 해방 이후 좌우대립은 전설이 됐고 군사독재와 산업화·민주화를 거치면서 보수와 진보는 분칠한 보수, 일그러진 진보로 괴물이 됐다. 어디 이뿐인가. 정치는 좌우로 나눠졌고 언론도 보수와 진보의 헤드라인을 더욱 선명하게 하고 있다. 광화문의 한쪽이 좌파의 시위로 채워지면 청계천 따라 오래된 화첩을 꺼내든 우파행렬이 나팔을 불고 있는 모습이 대한민국이다. 여기에 마지막까지 중심을 잡아주길 간절히 희망하던 법조계까지 정확하게 양쪽으로 갈렸다. 딱한 일이다. 좌우의 완충지대가 사라진 사회는 살벌하다. 언제 뒤통수를 까일지 모르고 어느 순간 까맣게 잊고 있던 일제강점기 친일 앞잡이였던 조부가 온라인에 도배될지 모른다.

 이번에 비난의 글을 올린 김동진 부장판사는 횡성에서 2개월 이하로 사육한 소는 횡성 한우가 아니라고 판결한 2심 재판장으로서, 대법원이 자신의 판결을 뒤집자 이를 정면으로 비판했다가 2012년 11월 서면경고를 받은 인물이다. 당시 그는 "대법원이 교조주의에 빠져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하는 이상한 결론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그가 비난한 재판장 이범균 부장판사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사건의 주심을 맡아 유우성 간첩사건 무죄,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대선개입 의혹 사건도 무죄를 선고했다. 모두 검찰의 증거가 유죄를 판단하기에 미흡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참 우스운 일이지만 이 부장판사가 유우성 사건에 대해 무죄선고를 내리자 당시 진보진영은 환영, 보수진영은 '386 운동권판사'라 매도했다. 반면 김용판 판결 때는 진보는 '정권 입맛에 맞췄다'고 비난하고, 보수는 '양심에 따른 판결'이라며 입장을 바꿨다. 여야가 법원 판결을 각각의 정치적 입맛대로 치켜세우거나 손가락질하고 있는 현주소다. 판결이 사회적 이슈에 대해 정리정돈을 해주었던 과거는 낭만주의 시대가 됐다. 지금 대법원 앞은 좌와 우, 보수 비슷한 보수와 진보 비슷한 진보들이 온갖 플랜카드를 들고 판결과 함께 자신들 만의 '마스터베이션'을 벌이는 꼴불견이 벌어지고 있다. 그 정도쯤이면 시끄럽긴 해도 못들은척 넘어갈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판결과 함께 결과를 두고 법원 내부에서 정치판결 운운하는 자해소동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그는 법치가 죽었다고 했지만, 그의 글을 접한 이들은 이 나라 사법부가 스스로 자해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지적한 대로 이번 판결이 '쇼'이거나 '궤변'이라면 무엇이 쇼이고 어떤 부분이 궤변인지를 행간을 지적하며 따졌어야 했다. 그 근거는 무엇보다 법관의 판결이 정치적·이념적 편향성 논란에 휘말리거나 공정성에 의심받으면 사법 불신을 초래하고, 나아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한다는데 기초해야 한다. 그런 장치없이 '쇼'라 하고 '궤변'이라며 손가락질 하면 시정잡배의 싸다구질이나 다를게 없게 된다.

 지금 우리 법조계는 좌파 성향 판사는 좌파 정치인 후원회에 참석하고 우파 성향 판사는 우파 정치인 후원회에 참석하는 줄서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뤄지고 있다. 일부 판사들은 SNS를 통해 민감한 시국상황에 대해 개인적 견해를 밝히며 스스로 나서길 즐기고 있다. 한마디로 불량 판사들이다. 내부에서 곪아 터지고 있는 잘못에 대해선 침묵하거나 소극적이면서 분노하는 국민들의 행동과 항의엔 유독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우리 법조계다. 그래서 법치가 죽은 것이 아니라 법조가 죽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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