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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문수산 중턱 나무의자에 누웠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깊어가는 가을 풀벌레 소리에 귀를 열어두고 있다. 먼 데서 들려오는 등산객들의 왁자한 소리가 바람을 타고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진다. 떡갈나무, 잣나무, 상수리나무, 솔 향이 바람을 앞세우고 다가왔다가 순식간에 건너편 골짜기로 옮겨간다. 저 아래 들판 어디선가 들려오는 농부들의 풍년가, 풀벌레 소리가 아련한 유년시절의 고향들판으로 데리고 간다.

 시골에서 칠 남매 중 셋째로 컸다. 어른들은 잠든 시간 말고는 늘 들판에서 허리 구부려 일만 하셨다. 가을이면 동네 앞 들판이 온통 황금 물결로 일렁이는 것을 부모님은 환한 얼굴로 바라보셨다.

 가을 들판에는 참새들이 판을 쳤다. 새들은 애써 지어놓은 한해농사를 무작정 서리하려 들었다. 떼거리로 날아와 마치 자기들을 위해 차려놓은 밥상인 냥 배를 채웠다. 새들이 단체로 앉았다가 간 자리가 허옇게 쭉정이가 되고 마는 것을 부모님은 애가 타 하셨다. 그걸 알았던 칠 남매는 동네 앞 들판을 지나칠 때마다 '훠이' 소리는 자동으로 흘렸다. 그때마다 놀란 '새가슴'은 후두두 먹던 밥숟가락을 던지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고는 했다. 그걸 지켜보던 허수아비는 기분 좋게 양팔을 수평으로 흔들었다.

 이른 아침, 쏟아지는 단잠을 반납하고 들판으로 나가 새를 봐야하는 일은 정말 귀찮고 죽을 맛이었다. 밤새 언니 오빠와 속살거리다가 늦은 잠자리에 들었으니 이튿날 아침잠은 당연히 꿀맛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기어코 방문을 열어젖히거나 바지랑대로 문고리를 툭툭 쳐가며 칠 남매를 들판으로 내몰았다. 아버지의 등쌀을 버티기란, 지렁이가 빙판 위에서 잠을 청하는 것만큼이나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그때마다 참새도 좀 먹어야 살지 않겠느냐는 짜증난 속내로 아버지의 매정함을 나무라며 볼 풍선을 불었다.

 대문을 나설 때는 엄마가 빨랫줄에 걸어둔 삼배 주머니는 꼭 챙겨야 했다. 메뚜기를 잡아넣기 위해서였다. 논두렁 풀숲에서 아침 이슬에 날개가 젖어 미처 날지 못하는 통통한 메뚜기가 지천이어서 그냥 손을 내밀어 삼배주머니에 넣기만 하면 됐다. 주머니의 배가 불룩해 질 때면 엄마 칭찬이 귀에 들리는 것 같아 자꾸 기분이 좋아졌다. 아침 메뚜기 잡기보다 더 재미나고 쉬운 일도 드물지 싶다. 이런 재미는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는 절대 모르는 일이다. 요즈음 같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죽이는 재미에 비하면 차원이 달라도 한참이나 다른 재밋거리다.

 참새들은 이른 아침이면 더 극성이었다. 밤새 근처 대숲에서 설핏 눈까풀만 부치고 나와서 인지 새벽부터 '째째' 거리며 요기에 설쳤다. 그들이 단잠을 깨운 장본인이었지만, 그리 밉지만은 않았다. 우리 인간들처럼 욕심을 부리거나 미래를 앞당겨 걱정하지 않는 맑고 선한 친구가 아니던가. 지금에서야 고백이지만, 나는 참새를 아주 미워서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저 웃 논에서 아래 논으로, 이쪽에서 저쪽 논두렁으로 부지런히 다니기만 해도 등줄기에는 흠뻑 땀이 흘렀다.

 참새나 삼배 주머니의 배가 만삭이 될 즈음 내 배는 고파왔다. 홍시 같은 아침 해가 동쪽 산 위로 두 뼘 쯤 오를 때면 집으로 향했다.

 아침시간에 새를 보는 일은 머리와 몸을 저절로 맑게 하는 전신운동이었다. 저절로 밥맛은 꿀맛일 수밖에 없어서 두레상 앞에 앉자마자 밥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했다. 책가방을 들고 대문을 나설 적에는 힘이 저절로 넘쳤다. 옛일이 최고의 웰빙 운동이었음을 안 것은 세월이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돈 들여 빌딩 칸에서 하는 요즈음의 운동하고는 차별화된 것임을 안다.

 해가 갈수록 최근 기억은 건망증이 심하지만, 오래전 일은 더 또렷하다. 가을 들판의 추억은 선명한 동영상이 되어 새록새록 그리움이 되었다.

 유년시절을 그리워해서 인지 나는 수시로 근처 채소밭을 어슬렁거린다. 주인을 기다리는 온갖 푸성귀가 노루귀로 반기는 그곳은 내 유일한 놀이터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싫은 듯 성장을 멈춰버린 부추 옆에는 기미가 얼룩얼룩한 고구마 잎이 수척하다. 그래도 마음만큼은 이팔청춘인지 혈기 오른발을 불쑥불쑥 내밀어 보인다. 발등을 만져주고 있으면 덩달아 젊어지는 기분이다. 채소밭 식구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더없이 편안하다.

 불가에서는 만물 중에 자연을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 했다. 자연만이 오직 진실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나, 인간이 들려주는 유정설법(有情說法)은 과장과 거짓이 있다고 한다. 온갖 풀벌레가 가을을 노래하는 문수산, 고구마가 한창 붉은 발등을 자랑하는 채소밭에서 나는 무정설법을 익힌다.
 문수산이 한해의 소임을 다하고 겨울채비에 들었다. 그간 지녔던 이파리는 다 대지로 돌려주고 동안거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 상수리나무가 던지는 도토리를 다람쥐가 날렵하게 달려들어 입에 물고 달아난다. 겨울채비를 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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