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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무료한 일상에 희망을 잃은 적이 있는가. 희망이 없는 일의 무수한 반복. 그것을 극복하는 힘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시시포스는 아이올로스와 에나레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그는 그리스신화 속에서 인간 가운데 가장 교활한 인물로 유명하다. 헤르메스로부터 들키지 않는 도둑 기술을 물려받은 아우톨리코스 조차도 그를 속이지 못했다. 도둑질한 물건의 형태나 색깔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우톨리코스는 시시포스의 소를 훔친 뒤에 모양과 색깔을 바꾸었지만, 시시포스가 미리 소 발굽에 찍어 놓은 표시 때문에 발각되고 만다. 시시포스는 이를 계기로 아우톨리코스의 딸 안티클레이아에게 접근하여 어울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안티클레이아가 라에르테스와 결혼하여 낳은 오디세우스는 사실은 시시포스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어느 날 시시포스는 제우스가 아이기나를 유괴하는 것을 목격하고 아이기나의 아버지 아소포스에게 알려 주자 제우스가 이를 노여워하여 시시포스에게 죽음의 신을 보냈다. 그러나 시시포스는 죽음의 신을 속이고 가두어 군신(軍神) 아레스가 구출하러 올 때까지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었다. 죽음의 신이 풀려나자 시시포스는 저승으로 가야만 했지만, 그는 이를 알고 아내 메로페에게 자신이 죽은 뒤에 장례식도 치르지 말고 시신을 묻지도 말라고 당부한다. 저승의 신 하데스는 시시포스가 죽었는데도 메로페가 장례를 치르지 않자 시시포스 스스로 장례를 치르도록 지상으로 돌려보냈다. 다시 지상의 세계로 돌아온 시시포스는 장수를 누린다.

 

▲ 티치아노 베첼리오 作 '시시포스(Sisyphus)' 프라도미술관(스페인)소장(1548~1549년경)

 그러나 죽은 뒤에 신들을 기만한 죄로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벌을 받았는데, 그 바위는 정상 근처에 다다르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져 영원히 되풀되는 형벌이었다.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 베첼리오가 그린 그림 '시시포스'를 보면 오묘한 느낌과 함께 서글픔마저 느껴지는 것을 '무익하고 희망없는 일의 반복보다 더 무거운 형벌이 없다'고 본 신들의 생각이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우리 인간의 모습을 단 한 장의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니였을까. 그림은 신화의 주인공. 시시포스가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세상에 태어나,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뭔가에 열중하며 오랜 시간을 살아야 하는 인간의 삶과 비슷해 보인다면 과장일까.
 매번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산꼭대기로 밀어올려야 하는 무의미한 일을 매일 반복한다는 것은 분명 가치없는 삶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조리다.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 삶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음으로써 자신의 철학을 시작한 카뮈가 떠오른다.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가, 혹은 없는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 철학적 문제라고 그는 생각했고 만약 살아야 할 가치가 없다면 그 해답은 바로 자살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자살을 거부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향한 회피로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부조리한 삶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치있는 삶을 우리는 살 수 있을까.
 우리는 삶의 어둠과 끊임없이 대결을 벌여야 한다. 평화를 갈구하지 않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반항, 그리고 희망과 내일이 없는 조건에서도 삶의 순수한 불꽃외에 어떤것에도 무관심한 자유로운 영혼, 삶을 필사적으로 불태우는 열정을 그 대결에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무거운 형벌속에서도 항상 깨어있는 '시시포스'야말로 인간의 참다운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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