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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각 구름이 자주 피어오르던 낭산(狼山)이다. 산허리가 잘록하며 양쪽으로 각각 봉우리를 이루었다. 아침의 안개는 산의 모습을 쉽사리 내보이지 않으려고 낮게 깔렸다. 초입부터 소나무들이 융성하던 역사를 머금은 듯 처연하다.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오르니 선덕여왕의 능이다. 마음을 가다듬어 참배를 하고 능을 돌았다. 아랫부분에는 능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석으로 2-3단의 축을 쌓아 비바람에도 흘러내리지 않도록 해 놓았다. 봉분은 마치 작은 산봉우리를 옮겨 놓은 듯하다. 능을 돌다 청설모가 오르락 내리락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나무들의 모습이 사뭇 신기하다.

 나무나 꽃들이나 태양의 기운에 따라 가지를 뻗고 자라는 것이 식물들의 본능이다. 그러나 여기 낭산의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능을 향하였다. 능 뒤편의 나무들이야 남쪽에 있는 능을 향하는 것이 응당하다. 그러나 능의 좌우에 있는 나무들도 모두가 능을 보고 가지를 뻗었다. 사극 드라마에서 본 문무백관들이 왕 상을 향해 문안을 드리는 형상이다. 아니 마치 능을 향하여 참배를 드리는 것 같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선덕여왕은 봄을 기다려 핀 꽃처럼 고귀한 인품을 지녔던 것 같다. 덕과 지혜가 은은한 향기를 내뿜었다 하니 천향국색이라 해도 과찬은 아닐 것이다. '지귀설화'가 생길 만큼 남성들이 그를 사모했다고 한다.

 사모하는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사후에나마 바라보고 싶어서일까. 이름과 같이 '덕만'을 베풀어서 나무들도 고마움의 표를 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도 저도 아니면 한번 섬긴 마음은 일편단심 변하지 않는 충신의 사명 이려는가.

 여왕의 삶도 되짚어보면 화려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재위 당시 닥쳐오는 난들을 피할 수 없었다. 시시로 난을 겪으며 한 시대를 이끌기란 고초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비를 행하고 지혜가 뛰어났다고 알려졌다. 그런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군주라는 자리가 물속에 떠 있는 달을 건져내는 것과 같이 어려운 것이리라. 청정한 저 나무들도 지난날의 노고를 생각하여서일까. 아니면 군주에게 예를 다하는 것일까.

 우연이라 하기에는 기이하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동서남북에 있는 모든 이들이 다 같이 저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철에 따라 잎을 피었다 떨어뜨리는 나무가 아니다. 춘하추동 푸른 잎을 달고 장수를 상징하는 소나무들이다. 나무들도 천출로 저렇게 된 것이다. 누가 만들었거나 강요를 한 것도 아니다. 분재처럼 철사로 묶여 비틀었거나 새끼줄을 쳐서 잡아당기지도 않았다. 더욱 희한한 것은 능에서 몇 발자국 앞에 있는 나무였다. 이 소나무는 본래의 단단한 특징은 간데없고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졌다. 마치 버들가지처럼 유연하다.

 그 약한 몸뚱이 위에는 청순하리만치 푸른 솔잎은 동그랗게 큰 원을 만들었다. 큰 키와는 다르게 나무의 굵기는 내 팔뚝만 하다. 그 가느다란 나무는 우산대처럼 동글하다. 흡사 큰 우산을 펼쳐 든 것 같다. 아니 누가 봐도 왕이 행차할 때에 쓰는 일산(日傘)을 연상하게 할 것이다. 일산모양을 한 나무는 큰 고목 사이에서 한 발자국 앞에 나가 있다. 능의 주인이 출타하기를 기다리는 자세다. 혹 햇볕이 따가운 날이면 저 큼직한 푸른 일산을 받쳐 줄 모양이다.

 그때부터 왕은 신령스러움을 지닌 산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일까. 어떻게 알았을까. 아마 미래에 대한 예지력을 가지신 분이 틀림없다. 그리하여 익히 이 산을 일으켜 수미산 위에 있는 도리천이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왕은 내가 죽으면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했다. 오늘에야 자세히 보니 왕의 예언대로 도리천이 완연하다. 나무들만 보아도 예사로운 산이 아닌 듯하다. 천 년이 흐르는 동안 예를 다하고 또다시 몇 천 년이 흘러갈지 모르지만, 백관처럼 둘러서서 능을 보호하려는 몸가짐이다. 능에는 문인석이나 무인석 하나 세우지 않았다. 고풍스러운 난간석도 아예 없다. 그래서 나무들이 차처해서 무인석을 대신하여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푸른 나무들이 충의를 지키며 저렇게 능을 에워싸고 있는 것에 놀랐다.

 덧없는 것이 세월이긴 하나, 선덕여왕은 어려움을 참고 굳건하게 나라를 지켜온 보람을 느꼈을 터이다. 힘들었던 군주의 삶에 자부심을 가졌으리라. 정녕 유유히 흘러간 세월이 허망하지만은 않았다고 여기는지도 모른다. 사후에까지 나무들조차 잊지 않고 있으니, 그는 무덤 속에서도 맑은 미소로 답례하리라 여겨진다. 만약 영혼이 있다면 흐뭇해하지 않을까.

 능을 향한 나무들을 쳐다본다. 그리고 존경심마저 든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뭐니 뭐니 해도 사람에게는 '덕' 만한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낭산=선덕여왕능이 있는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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