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울을 비롯해 호남과 중부지방까지 눈 소식이 들린다. 오늘은 울산에도 첫 눈이 내렸다. 나의 유년 시절에도 눈이 많이 왔다. 무수히 내리던 눈을 맞으며 동구 밖까지 강아지와 함께 뛰어다녔다. 그 일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내 머리에는 사시장철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다닌다.

 내가 어릴 때에는 긴 겨울밤의 먹을거리는 동치미가 별미였다. 살얼음이 동동 뜬 동치미 맛은 지금도 짜릿하게 혀끝에 살아 감돈다. 동치미로 배를 채우고 따뜻한 아랫목에 파고들어 할머니에게 들었던 옛이야기는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옛날 어느 산골 마을에 곰보 처녀가 있었다. 그 시절에는 선도 안 보고 혼인을 했었다. 총각이 첫날밤에 호롱불 밑에서 신부의 얼굴을 대하니 빡빡 얽은 곰보였다. 천하에 둘도 없을 박색이었다. 신랑은 휘영청 밝은 달이 문살을 비출 때까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야상 받은 술이나 먹고 줄행랑을 칠 각오를 했다. 혼자 술을 줄줄 마시고 있으니 곰보 신부는 족두리를 쓴 채 벽에 기대어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꼴을 보니 신랑은 하도 기가 막혀서 저절로 한탄이 나왔다. 술을 마셔가며 속으로 하는 한탄이 밖으로 새어나와

 "곰보야 곰보야 무슨 정에 잠이 오노" 
 "동해 동산 낭기(나무) 좋아 방이 더워 잠 잘 온다"
 그리고 또다시 잠을 자는 것이 아닌가. 이왕지사 갈 때 가더라도 한마디 더 들어 보려고 했다.
 "곰보야 곰보야 무슨 녘에 잠이 오노"
 "시절이야 시풍하야 배가 불러 잠 잘 온다."
 이렇게 답변이 오자 신랑의 마음이 설핏 바뀌었다. 얼굴은 비록 박색이지만 이견은 넓은 사람이라 여겨져 첫날밤을 잘 보내고 그 후에 아들딸을 낳고 잘 살았다.

 외모만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그때는 몰랐지만 나이가 들수록 마음에 와 닿는다. 재치 있게 받아넘긴 신부의 언변이 도망갈 신랑을 붙잡은 것이다.

 만약에 신랑의 처지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나는 아마 울고불고 야단이 나지 않았을까. 아무튼 도량이 넓은 신랑 신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는 옛말이 있지만 이 신부야말로 말을 잘 해서 평생의 동반자를 놓치지 않고 붙잡은 것이 아니겠는가.

 할머니께서는 이야기를 마치고는 언제나 똑같이, 너도 커서 이다음에 시집가면 군구 호걸 짝을 만나 춘초지당 맑은 물에 원앙같이 사랑하며, 여중군자로 꼭 부자가 되어 잘 살 거라며 덕담과 희망을 주셨다. 그래서 나는 시집만 가면 부자가 저절로 되는 줄 알았다. 돈이 함박눈이 오듯이 쌓이는 줄 알고 시집가면 제일 먼저 할머니 털 스웨터하고 양단 치마저고리 해주고, 그다음 우리 식구들 내가 좋아하는 차례대로 좋은 옷은 다 해 준다는 약속을 수도 없이 했다.

 할머니는 내가 하는 말만 들으시고도 선물을 받으신 것 같이 인자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시곤 하셨다. 그때 할머니가 머금은 미소는 내가 소풍가서 본 석굴암 부처님의 미소와 똑 닮아있었다. 그 미소가 지금은 꿈속에서 본 듯 아련히 가물거린다.

 할머니께서 우리 남매들을 키울 적에 날마다 부르시는 노래가 있었다.
 "돋아오는 반달은 밝기가 희미하고, 둥실둥실 보름달은 달 가운데 계수나무가 박혀서 덜 좋고, 덤 풀 밑에 무 찔레는 진딧물이나 끼었고, 돌방돌방 깎은 밤은 모가 져서 덜 예쁘고, 내 강아지들은 저런 것에는 견줄 데가 아니구나. 어화둥둥 내 강아지야."

 옛 추억이 그리울 때면 딸아이에게 그때의 할머니처럼 나도 이야기를 들려준다. 딸아이는 언제나 나의 이야기가 우습다고 한다. 추억 속에 저장된 옛이야기들을 할머니가 만들어놓은 묵은 지 같아 언제 꺼내 들어도 맛이 좋다. 눈이 펑펑 내리던 날 밤에 할머니에게 듣던 그 이야기가 어디에서 날아와 창문을 흔든다.

 자품 있고 입담 좋은 할머니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아랫목 이불 속에 발들을 오글오글 넣고 무수한 상상력의 나래를 폈다. 두 귀를 쫑긋이 갖다 대고 작은 눈들은 별처럼 빛이 나고, 계모의 심술이 담긴 마음 아픈 이야기나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하는 무서운 이야기에 젖어 있을 때면, 달빛도 그 재미에 걸려서 지나던 발걸음을 멈추다가 갔지 싶다. 추억 속에 갈무리한 할머니의 이야기는 발효가 잘된 농주 같은 맛이었다가 때론 상큼한 사과 같은 맛이었다가, 어떨 때에는 구수한 숭늉 맛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어린 손주들에게 따뜻한 마음과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들려준 것일 게다. 무겁지 않게 지닐 수 있는 한 권의 서책을 나에게 선물한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 같은 날도 할머니가 곁에 있다면 바람이 문풍지를 울리는 매서운 추위도 아마 잊었을 터이다. 긴 겨울밤도 짧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바람이 세다. 한설 주의보가 내려졌다.

 바람이 창문을 거세게 두드린다. 눈이 내리는 밤이면 실꾸리에 실이 풀려나오듯 흘러나온 할머니의 이야기가 속절없이 그리워진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