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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모처럼 찾은 서점가는 만화 '미생'이 좋은 목을 점거했다. 시리즈 만화물이 베스트셀러를 제치고 서점 중앙홀을 꿰차고 있는 풍경은 낮설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미생을 향하고 있었다. 한 케이블 드라마 '미생'이 인기몰이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모두가 '미생'이었거나 미생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미생'의 초반부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주인공격인 오상식이 고등학교 시절 절친이었던 친구를 바이어로 만나 새로운 영업에 나선 극화다. 고교시설 절친이었기에 오상식은 당연히 자신의 영업도 성공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정작 바이어와 영업맨으로 만난 고교시설 절친은 '갑질'을 했다. 술 접대를 바라고 오상식에게 갖은 굴욕을 안겼지만 돌아온 결과는 결국 계약을 체결할 수 없다는 통보뿐이었다. 게다가 그 친구는 오상식에게 "넌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때 넌 갑 같았다. 그래서 나도 갑질 한번 해보려고 했던 거다"라는 말을 남긴다.

미국 JFK공항에서 기내 땅콩 서비스 문제로 비행기를 회항시킨 슈퍼갑 조현아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사무장을 파일로 툭툭치고 조종석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모자라 무릎을 꿇게하고 비행기를 돌려 내리게 한 그에게 사회는 돌팔매질을 한다. 고생 모르고 자란 갑질의 대명사라느니, 오너 딸이라고 직원을 종으로 생각하는 안하무인이라느니 등등 그의 행위는 곧 그의 가족과 재벌2세, 3세들의 윤리관으로까지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과거에 재벌가족들이 벌인 갑질의 유형과 사례까지 낱낱이 되살아나 '갑질' 시리즈가 연말을 달구는 양상이다.  

'미생신드롬'이라 할 만큼 갑질에 대한 비아냥이 우리 사회에 반향을 일으킬 시점에 터진 이번사건은 시기적으로도 절묘했다. 그래서 더욱 사회적 파급력이 큰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자. 우리는 '갑질'에서 자유로울 수 있나. 갑질을 비아냥거리는 사회는 갑질을 동경한다. 울산의 모 단체장은 외국출장 중 비행기 티켓을 제대로 체크하지 않은 직원을 향해 고성을 내지르고 면박을 주는 것도 모자라 다음 인사 때 좌천을 시키는 일이 있었다. 그 뿐인가. 모 단체장은 부하 직원에게 지속적인 성희롱을 일삼다 자리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최근엔 한 단체장이 부하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갑질로 사용하다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런 그들도 한 때는 '미생'이었고 '을'이었다.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 사회 곳곳에는 이런 갑질의 반복이 잠복하고 있다.

웹툰 조회건수 11억 건, 만화 200만부 판매, 드라마 시청률 8%대인 한 케이블드라마 '미생 신드롬'은 직장인과 자영업자,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미생들의 고달픈 삶에 대한 위안일 수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을의 입장에서 바라본 사회는 갑질 천국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런 우리도 갑질해 온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김수영은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그런 무심한 갑질을 발견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이하 중략) 갑질에 분개하지 못한 시절의 자괴감이라 스쳐 보내고 싶지만 김수영의 일갈처럼 그런 우리도 갑질을 하고 있다.

문제는 갑질을 하는 이의 심리다. 갑질을 통해 자신이 훌륭하고 좋고 우월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방법으로는 도무지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방법을 모른다. 갑질이 아니면 스스로가 을이라는 생각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법에 익숙한 뇌세포는 끊임없이 갑질을 부추긴다. 배우지 못했고 방법을 모르니 갑질이 최선의 치유책이다. 바로 그런 사회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것이 우리다. 그래서 갑질에 삿대질하는 사람들의 비아냥과 분노가 연민과 안타까움으로 바뀌는 사회를 희망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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