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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아 연초 해맞이를 갔다. 그리 멀지 않은 토함산으로 정했다. 7번 국도를 올라가다 불국사를 지나 토함산을 오른다. 어두운 새벽인데 해맞이 오는 이들의 다양한 연령대에 놀랐다. 하기야 늙고 젊고 간에 꿈이 없는 이가 없을 것이며, 소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능선을 따라 발길들로 줄이 뻗쳤다.
 그 틈에 나도 끼었다. 따지고 보면 어제 뜨던 해가 오늘에도 뜰 것이지만, 사람들은 너도나도 새로운 해가 떠오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산봉우리에 먼저 올라서려고 분산을 떤다. 해가 뜨기도 전에 올라온 이들마다 모두 동쪽을 주시하고 섰다. 저 멀리 구름이 낮게 깔린 동해바다가 어둠에서 깨어나고 있다. 마치 바다는 다홍치마를 두른 듯 붉게 물이 들기 시작했다. 한참을 지나니 차차 서광이 비친다. 드디어 해님이 서서히 올라온다. 그야말로 수줍은 열아홉 살 새색시가 시집이라도 오는 양, 조심스레 연지곤지를 찍은 듯 맑고도 곱다. 아니 찬란하게 빛을 낸다. 을미년(乙未年) 또 한 해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매사에 순한 양같이 살고 싶어서일까.
 

 해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소원을 빈다. 해가 아니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것처럼. 두 손 모아 절을 연거푸 하는 사람, 소원을 적은 쪽지를 소지처럼 올리며 손을 싹싹 비벼대는 늙수그레한 아줌마, 대중없이 환호성을 지르는 아저씨, 크고 작은 아이들은 만세를 부르며 야호 소리를 질러댄다.
 나도 뒤질세라 마음에 먹은 소원을 햇님에게 빌고 빌었다. 살을 에듯 차가운 새벽기온에도 갖가지 무지개 꿈을 염원하는 이들은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하기야, 사람의 염원만큼 더 강한 것이 또 있으랴. 해는 세상 사람의 모든 부탁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붉은 광채를 내면서 웃기만 하는 것 같다.
 

 사면을 살펴보니 푸른 솔의 향기는 바람에 밀려온다. 상수리 나뭇잎은 계절을 어기지 못하고 한 잎 두 잎 떨어져 헐벗은 가지만 바람에 윙윙 흔들린다. 코끝에 스치는 것은 상큼한 내음, 귀에 들리는 것은 바람 소리, 자연이 만들어 주는 선물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원체 좋은 경치는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맛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느새 잿빛 구름은 토함산 중턱에 누각처럼 걸터앉았다.
 공기의 청정함을 소유하는 이가 있다면 이처럼 청청한 공기도 실컷 마시지 못하지 싶다. 이런 정취에도 맘대로 빠져보지 못할 것이 아닌가. 그나마 주인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랴. 매일 보던 하늘이고 매일 보던 햇님인데, 오늘은 왠지 다른 느낌이다.
 

 옛날 '시' 잘 짓던 이 태백은 채석강에서 놀았었고, 중국의 적벽강에는 소동파가 시를 지어 붙였다고 했는데, 이런 풍광을 보고서도 시 한 수를 읊지 못하는 나의 재주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눈으로 즐기고 입으로 감탄할 뿐이다. 구름을 머금기도 하고 토해내기도 하는 토함산의 경치는 이른 아침,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중턱에 깔린 구름을 맑은 해가 거둬가니 산도 제 모습을 감추지 않고 서서히 드러낸다. 높은 산, 깊은 계곡, 구비마다 절경이다. 바람도 쉬러 갔는가. 아무런 소리가 없으니 산새도 늦잠에 들었는지 고요하기 그지없다.
 

 해는 모든 것을 다 키우고 덮여줘도 유유히 말이 없다. 산도, 크고 작은 나무와 돌들을 보듬었다. 좋다고 넘치거나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삐걱거림이 없는 유장한 모습이다. 그 앞에 선 지금, 빛바랜 나의 삶을 돌아보면 묵은 연줄같이 끈끈하다.
 자신을 스스로 내려놓고 내면을 성찰 해본다. 마음을 풀어놓고 즐거워할 일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그보다 가슴 따뜻하게 남을 보듬어 보았던가. 지난날의 소심함이 부끄러움으로 밀려든다. 나 돌아가리. 태어날 때의 본연의 심성으로.
 사람이란 본래의 바탕으로 돌아가는 것만큼 더 큰 일도 없을 성싶다. 천지를 비추는 해를 바라보면서 마음 한 편을 다잡는다. 과거란 언제나 현재를 단단히 다지는 지렛대가 아니던가.
 만물의 유전자처럼 펴져 나오는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셔온다. 을미년에도 우리 모두가 이 햇살처럼 따스하고 밝은 미소가 번져나면 좋겠다. 북적이던 사람들도 어느덧 하나둘 가고 없다. 생각에 젖은 나는 해를 안고 바닷가 모래밭의 자라 걸음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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