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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할 때부터 머리가 아프더니, 저녁 무렵에는 아예 몸이 절절 끓었다.
 화장을 겨우 지우고 침대에 누우니 끙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불을 돌돌 말고 벽을 보고 있자니 문득 '아버지 손바닥이 내 이마를 짚어주면 낫겠는데, 기운이 좀 나겠는데.' 싶으면서 핑 눈물이 돌았다.
 딸이 건네준 진통제를 입에 털어 넣으며 우는 듯 웃는 듯 중얼거린다. 흙 속에 계신 아버지께서 어떻게 나와서 내 이마를 짚어준단 말인가!
 어릴 때 만져본 아버지의 손바닥은 굳은살이 온 손바닥을 덮어서 부드럽기보다는 오히려 맨들거렸다. 대리석처럼, 고래 등뼈처럼, 슬레이트 지붕처럼.
 

 논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점심을 드시고 낮잠을 주무시면 얼른 달려가 아버지 손바닥 위에 내 손을 포개고 비벼보았다. 늙은 소나무 잎이 바람에 수런대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흙냄새가 피어올랐다.
 아버지 손바닥 다음으로 남자의 손바닥 감촉을 느껴본 것은 고3 때였다. 여름방학을 하던 날 남자 친구가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잠시였는데 손바닥이 인절미처럼 말랑말랑했다.
 좀 더 자라서 남자와 악수를 할 기회가 잦아졌다. 그런데 상대 남자들의 손이 하나같이 부드러워서 충격이 되었다. 점점 남자와 악수를 하는 일이 부담스러워서 손을 슬쩍 빼기도 하고 엉거주춤 악수를 피하기도 하다가 우연히 내 손이 여자 손 치고 너무 거칠고 딱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손을 두고 평생을 밭에서 일한 시골 아낙 같다고 한 이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내 손이 아버지의 손과 꼭 빼닮았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서른 고개를 넘을 즈음에는 내가 아버지의 손뿐만 아니라 발과 다리, 얼굴, 생김생김이 빈틈없이 닮아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몸이 무척 약한 분이셨다. 부지런하셨지만 훌륭한 농부가 못 됐고, 자식이 많았지만 한 명도 살갑게 안아주는 적이 없었다. 남자다운 용기와 패기도 없어서 마을 이장도 한 번 해보지 못하셨다. 엄마의 보살핌 없이는 혼자 언양 장 나들이도 못 하셨다. 소주 두 잔에 어깨춤이 절로 나왔지만 끝까지 부를 줄 아는 노래 한 곡조가 없었다.
 내가 아버지 손을 그렇게 좋아하고 놓지 않았지만 내 손을 잡고 논밭 길을 걸어 주거나, 동구 밖을 정답게 거닐어 본 적도 없었다. 단지 내가 손을 만지면 손을 뻗어 가만히 계시기만 하셨다.
 시집가서 한 동안 아기가 없어서 걱정하고 있을 때 어느 날 아버지께서 까만 어미 염소가 새끼 두 마리를 낳는 태몽을 꾸어 선물해 주셨고, 거짓말 같게도 쌍둥이를 얻었다. 나는 그것으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실 평생의 사랑을 한꺼번에 주셨다고 생각하고 산다.
 아기를 낳고 친정에 몸조리를 갔을 때, 소죽을 끓이시다가 들어오신 아버지가 아기들을 바라보시다가 내 이마를 쓰다듬으며 '요것들이 염소 새끼들이었구나 그쟈' 하시던 음성이 아직도 쟁쟁하다.
 아버지 몸에서는 늘 소똥 냄새가 났고, 손톱 밑에는 까맣게 때가 끼어 있었다. 브루셀라라는 병이 돌아 키우던 소가 한꺼번에 다 죽어서 몸져 누웠을 때도 아버지는 옆에 누운 나를 끌어당기며 말없이 이마를 쓸어주셨다. 
 

 아버지는 요양병원에서 오래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계시는 동안 요양 보호사들이 어찌나 아버지를 깨끗하게 씻겼는지 발이고 손이고 평생 흙 속에 담그고 사신 분답지 않게 그래, 마치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온 도시 할아버지 손 발로 만들어 놓았다. 그 발로 근 2년을 누워 계셨지만 내가 그리운 것은 아버지의 때 묻은 손, 냄새 나는 손이다.
 흔한 말로 아버지는 정을 뗄 만큼 떼어놓고 가셨다. 오죽 했으면 돌아가셔도 더는 그립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 칠 정도였을까. 일 년이 지나도 아버지가 보고 싶은 날이 오지 않아서 아! 내가 참 불효자구나 싶은 날도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거칠고 아프고 말없던 손바닥을 내 이마가 기억하고는 그 흔한 감기 몸살을 앓는 초저녁에 불현듯 찾아와 눈물짓게 한다.
 아버지가 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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