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가 사춘기를 넘어갈 무렵에는 펜팔이 유행이었다. 텔레비전도 없고 방송매체라고는 라디오가 유일한 벗이었다. 라디오만 있으면 한낮의 편지 사연이나 펜팔의 사연을 심심찮게 듣고 즐길 수 있었다. 그 시절에는 어디서 주소를 얻었는지 이름도 얼굴도 전혀 모르는 군인한테서 군사우편이라는 도장이 팍 찍힌 편지가 날아오기도 했다. 아마 동네 총각이 입대하고 본인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주소를 가르쳐 주었던 것 같다.
 글로써 주고받는 재미는 그 시절 젊은이들에게 생활의 활력소였다. 상대방을 모르는 상태에서 편지를 주고받은 일들을 돌이켜 보면 우습기도 하지만 낭만적이었다. 하루가 멀다고 온 편지를 읽고 밤하늘의 별빛만큼이나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밤이 깊도록 답장을 쓴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 시절 내가 아는 한 총각은 군대에서부터 펜팔을 하여 제대를 하고도 몇 년 동안이나 구구한 사연을 나누며 먼 훗날을 기약하며 사랑을 명세했다. 경주의 안압지며 반월성을 거닐며 이수일과 심순애처럼 그들의 사랑은 오월의 보리 익듯이 무르익어 갔다. 아가씨는 총각 집까지 와서 어른들께 인사도 드렸기 때문에 쉽사리 마음이 변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런데, 총각의 옆집 친구가 놀러 온 친구 애인을 보고는 주소를 알아서 한 달여 만에 그 여자를 빼앗은 것이다. 핑크빛 꿈을 안고 미래를 기약하던 사랑은 간 곳 없고 그 아가씨는 육칠월 음식 변하듯이 마음이 변해 총각의 친구와 결혼까지 하게 됐다.
 그녀의 심장이 보통 사람들보다 더 두꺼운지 아니면 간이 함지박만 한지, 다른 곳도 아니고 사귀던 총각의 동네 친구에게 마음을 바꾸다니 사람의 마음이란 알 수가 없다. 그녀는 제쳐 두더라도 이웃에서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죽마고우인데 어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사랑에는 국경도 연령도 없다고들 하지만 친구간의 우정을 깨버릴 만큼 그녀에게 마음이 뺏겼던 것일까. 그 총각은 친구의 배신에 얼마나 허탈했을까. 온갖 시름을 감내하고 참는 총각을 보니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더 아팠다.
 

 총각은 오래지기 친구가 결혼을 하는데, 안 가려니 그렇고 가려니 속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비웠던지 결혼식장에 갔다. 그 날, 동네 사람들은 결혼식장에서 무슨 일이나 나지 않을까. 하루가 무사히 넘어가기를 바라며 마음을 졸였다.
 애인을 빼앗긴 그의 선후배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신라 천 년의 후손에 있어서 가장 잔인한 해라느니 동네 역사상 친구가 친구를 배신하는 기록에 남을 해라고 하면서 벌같이 떠들고 다녔다. 몇 년 동안 심심하면 입 반찬을 만들었다.
 그러나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상처를 받은 사람도 고향에서 터줏대감 행세를 하며 살아가고 아픔을 준 사람도 부부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 둘 다 잘살아 가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어느 한 사람이라도 행복하지 못하다면 과거의 일이 떠올라 괴로울 것이다.
 인연도 배필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살기 싫다고 하던 사람도, 다른 사람을 만나 자식을 낳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닐까.
 

 나도 부모님의 의견을 따라 형식적인 맞선을 보고 택일을 정하여 갑자기 결혼을 했다. 마치 콩죽이 넘어 오르는 것처럼 서둘렀다.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하면 도깨비에게 홀린 듯한 기분이 든다. 생전 처음 본 사람과 같이 생활하는 것은 첩첩산중을 별빛에 의지하며 걸어가는 마음이랄까. 성격이 나와는 다른 남편은 모든 것이 엇박자였다. 이웃에 싸움이 나면 나는 자다가도 구경을 가는데 남편은 그곳에 있다가도 집안으로 들어온다.
 "싸움구경이 얼마나 재미있는데" 하는 나를 보고 참 희한한 성격도 다 있다고 한다. 이처럼 공통점도 별로 없지만 사는 걸 보면 인연은 따로 있는 것인가 싶다.
 세월은 주름살을 낳기도 하지만 참을성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그동안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가기란 외나무다리를 한쪽 발로 건너가는 것과 같이 많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어언 산호혼식주가 지나고 나니 조금씩 닮아가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아픔을 받은 사람이나 갑자기 선을 보고 결혼을 한 나나 어차피 맞추어 가며 사는 인생이 아닐까. 요즘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운명을 이미 등짐처럼 짊어지고 태어나는 건 아닐까. 아직도 답은 아리송하기만 하다. 어찌 생각을 해보면 모든 것은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펜팔로 인해 아픔을 겪은 그도 세월을 보내면서 오늘이 있기까지 자기 인생을 성실히 만들어 온 대가가 아니겠는가. 운명이란, 미완성을 짊어지고 태어나 살면서 차차 완성 본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