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냉이꽃 침대에 누워본 적이 있는가.
 4월, 성질 급한 냉이는 꽃을 피운다. 비슷한 키로 밭이나 길가에 일제히 피어 있는 것이 마치 하얀 시트를 깔아놓은 침대처럼 보인다. 누워 봐, 내 꽃에 등을 대고 누워서 하늘 이불을 덮고 한잠 자, 세상에서 가장 낮은 헹가래도 쳐줄게.
 아! 봄이 왔으니 냉이꽃 침대가 곧 지천으로 진열되리라.
 하지만 꽃 핀 냉이는 먹을 게 없다. 국이나 나물로 먹기엔 늦다. 그렇다고 꽃 핀 냉이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도 아니다. 여름 냉이는 성숙한 열매와 가지를 말려 씨를 털어두었다가 먹기도 한다. 옛날에는 가난한 선비가 글을 읽을 때 냉이씨를 씹어서 허기를 견디었다고 한다.
 냉이의 납작한 열매는 역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데, 서양에서는 씨앗의 생김새를 보고 '목자의 지갑'이라고 부른다. 양을 치는 목자(牧者)들이 가지고  다니는 주머니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가을에 밭에 냉이가 많이 나면 그 겨울은 눈이 많이 오고, 적게 나는 해는 눈이 적게 온다고 옛사람들은 냉이를 보고 일기 예보를 내다보기도 했단다.
 

 어쨌든 봄 냉이 기별을 일찍 감지한 소문난 우리 다섯 자매는 만사를 제쳐두고 친정 동네로 향했다. 햇살을 등에 업고 익숙한 들녘에 엎드려 냉이를 캐기 시작했지만 그 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물거리도 국거리도 아닌 그냥 냉이 그 자체였다.
 2년 전 김장을 하기 위해 배추를 뽑으러 밭으로 갔던 우리 자매는 놀라운 것을 보았다. 여름 식물들이 머금었던 수분이 마르고, 푸른 기운이 저물 즈음이었는데 5촌 아재 배추 밭 이랑에 연둣빛 띠가 길게 뻗어 있었다. 바로 가을 냉이였다. 연하고 고운 빛깔을 지닌 냉이가 사방에 나 있었다. 어른 손바닥만한 냉이도 있었는데 하나같이 연하고 싱싱했다.
 우리 배추 밭에는 눈을 씻고 봐도 없는 냉이가 5촌 아재의 밭에 넘쳐났다. 우리는 서둘러 배추를 뽑고 아재의 배추밭에 들어가 냉이를 캐기 시작했다. 배추를 담아오려고 가지고 갔던 포대에 냉이를 가득 담았다. 음식마다 그 속에 담긴 영양소를 일일이 따지는 큰언니는 올 겨울 비타민 C는 해결됐다며 날이 저물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도시에 살면서도 들일을 좋아하는 넷째 언니는 코끝에 콧물을 줄줄 달고도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문제는 잠시 후에 일어났는데 배추밭 주인이 나타난 것이다. 배추밭 주인이 우리를 외지에서 온 배추 도둑으로 알고 큰 개를 몰고 왔다. 개라면 기겁을 하는 큰언니가 캐 놓은 냉이 더미로 넘어지면서 한쪽 다리를 접지르고 말았다. 개는 짖어대고 언니는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넘어지고 해는 저물고…. 미안할 것도 없는 아재는 냉이 포대를 집에까지 실어다 주었다.
 절뚝거리며 집에 돌아온 우리는 연로한 엄마 앞에서 배추밭 소동을 재연하며 떼굴떼굴 굴렀다. 엄마는 환갑이 지난 큰언니의 손짓 발짓에 아이처럼 웃었다. 
 그 해 겨울 데친 냉이로 우리는 초절정, 최고급 비타민을 공급받았다. 언니의 발목은 곧 회복이 되었고, 내년에는 보랏빛이 감도는 봄 냉이를 캐러 오자고 약속도 했다.
 

 하지만 이듬 해 봄, 우리 자매는 냉이를 캐지 못했다. 냉이는커녕 봄 들판에 한 번 서보지 못했다. 건강검진을 갔던 언니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근 일 년을 병원에 있으면서 언니는 생사를 넘나들었다. 하나 뿐인 딸의 장기를 이식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통증보다 더 깊이 아파하면서 언니도 우리도 그깟 냉이의 약속은 까맣게 잊었다.
 하지만 언니에게 그 약속은 그깟 냉이가 아닌 모양이었다.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에 돌아온 언니에게 큰언니가 물었다. 병원을 나가면 무얼 제일 먼저 하고 싶냐고. 언니의 대답은 의외였다. 냉이를 캐고 싶어.
 언니가 그리웠던 것은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냉이의 생명력 같은 것이 아니라 허리를 구부리고, 발로 흙을 밟고, 풀의 향기의 맡으며 웃었던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상, 그런 소소하고 평범한 날들이 그리웠던 것이다.
 그게 뭐라고! 통도사 황매화 개화 소식이 들릴 무렵 우리 자매는 두툼한 마스크를 낀 언니를 앞세우고 냉이를 캐러 갔다. 배추밭 이랑에 피었던 냉이는 혹한의 겨울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양지바른 길가에. 막 깨어나는 밭둑에 앉아 냉이를 캐면서 언니는 조용히 말했다. 아, 행복해.
 꽃이 피면 어떤가! 꽃이 피면 냉이도 한 떨이 꽃인 것을. 아무리 작은 바람에도 기뻐하며 파르르 떠는 냉이꽃이 피면 언니와 나는 냉이꽃 침대에 나란히 누워 꽃잠을 자기로 약속해 두었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