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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연말 써 보냈던 글이 책 속에 담겨 돌아왔다. 고등학교 모교 교지다. 20년을 넘게 잠재워놓았던 교지가 복간된 것이다. 늘 그렇듯 목차를 뒤져 내 글부터 읽는다. 필자가 아니라 독자가 되어 내 글을 끝까지 읽고 다른 페이지로 넘어간다. 어쩐지 책맛이 다르다. 오래된 추억의 맛이 달짝지근하고 간지럽다.
 고교 시절 나는 3년 내내 학교 교지 편집 위원이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얻어 쓴 유일한 감투였다.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내게는 왕관과도 같은 자리였다.
 토요일 오후가 되면 지금은 사라진 건물 옥탑방에 모여서 교지 만드는 작업을 했다. 친구들과 후배들의 글을 모으고, 기사를 쓰고, 교정을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뿔싸! 놀라 시계를 보고 일어나도 이미 늦어버린 시간.
 내 앞에는 다가오는 동물이 내가 기르는 개인지 나를 해치려고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개와 늑대의 시간' 앞에 서게 된 것이다.
 한숨 크게 내쉬고 달려야 할 때다. 숨이 목에 찰 때까지 뛰다가 돌아보면 멀리 울밀선 터널에 불이 들어왔다. 초승달 곁에 개밥바라기별이 뜨면 어둠이 시작됐다.
 하루에 네 번 다니던 버스는 끊긴 지 오래. 혼자 집으로 가는 길은 깊고 어둡고 멀었다. 황혼과 어둠 사이에서 걷고 또 걸었다.
 엄마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공부를 하고 오는 줄 알았기 때문에 혼자 다니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교지 편집 일을 계속 하고 싶어서 엄마에게 이 사실을 숨겼다.
 아침 등굣길. 공동묘지 언덕에서 내달리면 금세 닿았던 학교가 밤이 되면 걸어도 걸어도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교지 편집 일을 그만 두지 못했던 것은 그 사잇길에서 만나는 보물 때문이었다.
 계절이 피었다 지는 그 곳에 내가 있었다. 황혼과 어둠 사이에 서서 계절이 변하는 모습과 소리와 향기를 통째로 삼켰다. 그 곱던 보랏빛 오동꽃이 진 자리에서 송충이가 떨어졌고, 오디와 뱀딸기가 열린 여름 숲에서는 단내가 났다.
 아카시아, 배꽃의 향기가 숨을 막히게도 했고, 가을 들꽃이 떠날 채비를 하며 건네는 쓸쓸한 인사도 들었다. 어느 토요일, 선생님이 들려준 김소월의 시 '초혼'을 중얼거릴 때는 집이 더 멀었으면 싶었다. 
 그렇지만 써놓은 글은 별 거 아니었다. 학교에서 글을 좀 쓴다던 친구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연애시를 내놓았고, 나는 이도저도 아닌 나부랭이를 써제끼기 일쑤였다.
 또래 남학생들은 어설프게 인생을 노래하거나 진로를 고민하는 내용의 글을 썼고, 여학생들은 연애 감정을 노래한 연서와 같은 글들을 주로 썼던 것 같다. 그 때는 그런 글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교지에 관한 가장 선명한 기억은 '도시락'이라는 이름의 사발면(그때는 컵라면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았다)이다. 토요일 하교 후 배고픈 우리들을 위해 사발면을 학교 앞 가게에서 외상으로 사먹도록 허락해 주셨다. 편집 위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었다. 그 맛과 즐거움을 비할 데가 없었다. 
 책을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만지고, 내 마음을 글로 적었다. 훗날 글쟁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고, 좋은 책을 골라 읽을 여건도 마땅치 않았지만, 사발면을 먹고 글 속에 얼굴을 박고 있는 토요일 오후가 마냥 행복했다.
 글쟁이가 되리라 마음먹은 것은 먼 뒷날의 이야기지만 단언컨대 내 글의 원천은 고교 시절에 있었다. 때 묻지 않은 감성들과 교지를 만들었던 경험들이 작가가 되는 뿌리가 돼 주었다. 
 글쟁이로 살다 보니 이런 저런 제목으로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는다. 언제나 가장 진솔한 글을 쓴다고 자부하지만, 가끔 거짓된 마음과 허세가 담긴 글을 세상에 내놓기도 한다. 그래서 낯 뜨겁고 뒤통수가 근질근질할 때도 있다.
 그런데 그 시절 내 글 앞에서만은 나는 당당하고 싶다. 촌스러움이 질질 흐르는 모습이었지만 순진하였고, 정직하였고, 욕심 없었던 순수의 시절. 그 시절이 또 오지 않을 것 같은 우울한 확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거추장스럽고 복잡한 것은 모두 컴퓨터나 스마트폰 속으로 사라지는 요즘 부지런하여서 여유 있게 걷는 책 한 권이 있어 박수를 보낸다. 아름다운 시절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담아서 그리워질 때마다 넘겨 볼 수 있다니 축하할 일이다. 긴 잠에서 깨어난 교지에게 벚꽃 꽃다발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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