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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해서 집을 떠나게 될 때, 큰오빠가 중고등학교 때 쓰던 알루미늄 도시락을 몰래 들고 왔다. 왠지 고향집을 기억할만한 뭔가가 있어야 될 것 같아서였다. 그 몇 해 전 우리 집은 옛집을 헐고 양옥으로 지으면서 집안 세간이며 가재도구를 모두 바꾼 터라 예스러운 물건이란 게 거의 남아 있질 않았다. 화로며 경대며 반닫이며 하다못해 은비녀나 참빗, 반짇고리, 등잔까지 어느 날부터인가 하나둘 눈에 띄지 않게 된 것이다. 등잔은 전깃불이 들어오면서 일찌감치 없어졌는데, 나중에 내가 수집해볼 요량으로 골동품점에 들러 하나씩 사 모은 건데 이때 유실되고 말았다. 놋그릇 몇 벌과 옹기로 된 양념단지 등 기물 몇 가지가 남아 있었지만, 모두 짝이나 벌을 이루는 거라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어, 없어져도 눈에 띄지 않고 값도 나가지 않는, 그러나 나름 오래되고 손때 묻은 도시락을 들고 온 것이다.
 큰오빠의 도시락은 여느 도시락과 좀 다르다. 하얀색 양은에 모양도 납작하지 않고, 폭은 좁되 높이는 제법 두툼해 도시락치고 고급스러운 편이다. 피부가 뽀얗고 나이보다 앳돼 보이는 큰오빠를 닮았다. 오빠 성격이 워낙 깔끔해 제법 오래된 물건이지만 흠집없이 갈무리돼 있었다. 그러니 골동품에 견줄 순 없지만 기억하고 간수할 만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십여 년 전엔, 뭔가 오래된 물건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 독일로 연수를 떠나는 남편에게 벼룩시장에 들러보라고 했더니 오래된 회중시계를 하나 사왔다. 뚜껑을 열고 사진 같은 것을 끼울 수 있는, 문양도 정교하고 세련돼 보이는 시계였다. 드디어 집에 골동품 같은 것이 생겼다고 좋아했는데, 손목에 찰 수도 없는 것을 날마다 태엽을 감아줘야 해서 차츰 소홀히 하다 결국 고장이 나 서랍 속에 넣어두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엔 '진품명품'에 감정이라도 받아볼만한 물건이 도무지 없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전시한다고 오래된 물건을 보내달란 적이 있는데, 오빠의 도시락을 보낼 수도 없어서 빈손으로 보냈다. 나중에 학교에 가보니 병풍이며, 민화, 도자기, 칠보 공예품 등 가지가지 물건들이 전시돼 있었다. 역시 도시락이나 고장 난 회중시계가 낄 자리는 아니었다. 그 생각이 나서 얼마 전 인터넷으로 골동품(이라기 보단 아직은 그냥 옛날 민예품)을 검색해 보았다. 화로, 문갑, 풍경, 주발, 촛대, 떡살. 오래전 사라진 물건들이 다 있었다. 간혹 마음에 드는 게 있어서, 이참에 나도 예스런 물건 몇 점 가져볼까 하여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결제를 하려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실제 쓸 것도 아니고, 사들인다 해도 둘 데도 없고, 먼지 털어내기도 귀찮을 테고, 무엇보다 이 물건들에 내가 아는 사연이나 손때가 묻은 것도 아니고…. 결국 검색창을 꺼버렸다.
 

 나는 사실 물건을 잘 버리지 않고 오래두고 쓰는 편이다. 골동품이 따로 없을 만큼 이미 집안에 있는 물건들이 충분히 낡고 오래됐다. 더구나 물건마다 거기에 얽힌 갖가지 이야기나 추억이 있다. 결혼 전 남편이 선물한 '큰 나의 밝힘'이란 좌우명이 새겨진 펜 꽂이, 친정엄마가 사들고 오신 스테인리스 그릇, 큰아이와 함께 모은 우표첩, 작은 아이의 네 살 생일선물로 사주었던 회색 토끼 인형, 막내가 유치원 때 만들어온, 지금은 화분받침으로 쓰는 접시 등.
 장쯔이가 주연한 '집으로 가는 길'이란 영화엔, 주인공이 연모하던 선생님을 위해 음식을 담아두던 그릇이 깨지자 수선공을 불러 고치는 장면이 나온다. 수선공은 깨진 곳을 철사로 잇고 칠을 해서 감쪽같이 고쳐낸다. 설 연휴 홍콩에 있었는데, 식당에서 주둥이가 깨진 주전자에 보이차를 따라줬다. 우리나라의 경우 금이 가거나 이가 빠진 그릇에 음식을 먹으면 재수가 없다고 금기시 되는 편인데, 외국에선 오히려 그릇에 깃든 추억을 소중히 여기고, 그런 그릇이 많을수록 역사가 오래된 식당이라고 자랑스러워한다고 들었다. 이상한 일이긴 하다. 우리 조상들도 낡은 걸 고치고 기워 쓰는 건 이골이 났을 텐데 왜 유독 사기그릇에만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는지. 만약 그릇을 고쳐 쓴다면 손재주가 좋으니 영화 속 수선공 솜씨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하긴 이 빠진 그릇 만이랴. 요즘은 멀쩡한 가재도구나 가구도 쉽게 버린다. 그리고 장식을 위해 골동품을 사들인다. 하지만 골동품도 처음부터 골동품은 아니었을 터. 지금 우리가 일상으로 쓰는 물건도 후대에 가면 골동품으로 귀한 대접을 받게 될 지도 모른다. 낙관 찍힌 그림이나 저자 친필 사인이 있는 서적처럼, 골동품은 만든 사람이나 소유했던 사람이 밝혀졌을 때 더 가치가 있다. 물건에 깃든 사연, 이야기가 중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물건을 직접 사용하고 간수하며 아낄 때 생겨나고 입혀진다. 나는 오빠의 도시락을 지금도 사용한다. 물론 이젠 콩이나 팥 같은 곡식을 담아두지만, 밥에 콩을 넣으려고 뚜껑을 열 때마다 오빠와 고향집을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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