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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은 이제 제 고향입니다. 서른다섯 해를 사는 동안 정이 듬뿍 들었습니다. 갓 결혼한 신출내기 부부가 뿌리내릴 곳을 찾다가 터를 잡은 땅이었습니다. 삶이란 수레바퀴를 온 힘으로 굴리며 자식 출가시키고 내 집 마련까지 했으니 안태고향이나 진배없습니다.

 그간 청설모처럼 까맣고 윤기 흐르던 새댁의 머리는 푸석한 반백의 할머니로 변했습니다. 세월은 검은 머리를 가져가는 대신 지혜를 준다는 것을 알아가는 나이가 된 것입니다.

 울산은 아름답고 역동적인 산업도시로 각인된 곳입니다. 젖줄인 태화강을 중심으로 조선과 자동차산업이 주를 이루고 화학공단으로 출근하는 근로자가 태반입니다. 토박이보다는 각처에서 일터를 찾아 모여든 외지인들이 어우렁더우렁 정붙이며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곳이지요. 누구든지 부지런하면 잘살게 되고 자수성가할 기회의 땅이기도 합니다.

 울산을 처음 찾았을 때만 해도 요즘같이 맑고 깨끗한 도시의 느낌은 덜 했습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적도시 경주에 비하면 복잡하고 부산해서 여유나 여백이 아쉽고 물 설었습니다. 외지사람들이 서로 경계하면서 오는 현상인지는 몰라도 말씨는 투박했습니다. 나 또한 그들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눈 닿은 하늘과 땅은 회색빛이었습니다. 공단굴뚝에서 나는 검은 연기는 해를 가리고 공업용 폐수가 하천으로 흘러간 끝에는 태화강이 오염돼 물고기가 허옇게 죽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공단에서 들리는 망치질 소리는 낮밤 없이 우렁찼습니다. 나라 경제를 책임진 사람이 흘렸던 소중한 땀들이 선진국을 앞당겼습니다. 회색빛 하늘, 오염된 태화강 물이 나한테 득이나 실이 되는지는 대수롭잖았습니다. 당장 먹고 사는데 코가 석 자였던 내게 그런 것은 다 사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눈길 닿는 곳마다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전국에서 지역 총생산액이 가장 높은 곳, '살기 좋은 부자 도시'로 인정받았고 태화강에는 1급수에서만 산다는 재첩과 바지락이 40년 만에 서식지로 되살아났습니다. 주거환경정비가 여느 도시보다 잘돼 2014년 환경관리 평가에서 '생명이 살아 숨 쉬는 태화강 문화도시' 선두로 인정받았습니다. 이제 태화강은 자자손손 미래로 이어지는 청정젖줄로 흘러갑니다.

 아침 햇살에 은빛 가루를 마구 뿌려대는 강물 속에는 잉어며 붕어, 버들치가 '물 반, 고기 반'으로 펄떡거립니다. 산책길을 걷던 사람들이 물고기 '재롱점프'에 함박꽃으로 탄성을 지르며 아침을 맞습니다. 이러니 머지않아 장생포 앞바다를 유영하던 고래가족이 여행 삼아 이곳을 기웃거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대숲이 어우러진 태화강 생태환경은 이미 백로나 두루미, 왜가리 같은 철새들의 도래지가 됐고, 매일 저녁나절에 펼치는 까마귀떼의 군무는 가히 장관이라 혼자 보기가 아깝습니다.

 작년 가을에는 떨어져 사는 벗을 불렀습니다. 태화강 공원을 찾은 우리는 소녀 시절로 돌아갔습니다. 한껏 멋을 부리고 기다리던 양귀비며 작약, 날씬한 자태를 자랑하는 수레국화, 가는 허리가 요염한 안개꽃이 들려주는 합창에 꽃 멀미가 났습니다. 근처 십리대숲 길을 걸으면서 저절로 '시인'이 되었습니다. 저물녘 돌아오는 길가 은행나무 가로수는 노란 열매를 어찌나 푸지게 내려놓고 있던지….

 울산은 사랑으로 몸 담고 살아갈 고향입니다. 삶이 시들한 날은 장생포 앞바다 고래유람선을 타고 어느 남자가수가 불렀던 '고래사냥'을 신청한다면 금세 힘이 생겨날 것 같습니다. 늙어 감성이 줄어들거든 정자나 주전 바닷가 몽돌밭을 거닐며 고것들이 들려주는 '울산 아리랑' 가요에 한나절쯤 귀를 담그고 와도 좋을성 싶습니다.

 요즈음 나는 매일 아침 강변을 걷습니다. 유채꽃이 내는 노랑 물감을 풀어 밑그림을 그려놓은 강물 위로 새벽 물안개가 하얗게 피워 오릅니다. 잔잔한 물위를 오리 가족이 V자를 그리며 평화로이 노니는 풍경은 한 폭의 명화를 그려놓고 있습니다.

 길가 풀숲은 물빛 다이아몬드를 소복이 달고 주인인 나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황금빛 아침 햇살이 다가올라치면 망설임 없이 지녔던 보석을 스르르 대지로 내려놓는 자연의 섭리를 가르칩니다. 그때,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비발디 '사계' 음악이 주는 절묘한 극치를 '유토피아'라고 전하렵니다. 날마다 황홀한 선물을 받고 사는 나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내 삶의 쉼표를 찍게 해준 울산이 고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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