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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이사

예삿일이 아니다. 워낙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이라 새삼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해마다 봄이면 불안공포증에 휩싸일 정도로 나라 안팎이 어지럽다. 이번에는 메르스다. 사막의 바이러스가 이역만리 동방의 한반도를 이만큼 강타할 것으로 누가 예상했겠나. 딱한 일이지만 이번에도 여전히 박근혜 정부는 우왕좌왕이다. 사망자가 또 나왔다. 3차 감염자가 계속 늘고 있고 4차 감염자 이야기도 나오는 상황이다.

 문제는 정부의 대응이다. 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정부는 격리 대상자 대부분을 자택에서 지내게 하면서 일부 노약자만 국가 지정 시설에 격리했다. 이 정도 문제는 문제도 아니다. 격리 대상자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감염자를 놓치는 일도 발생했다. 뒤늦게 당정청이 움직이고 연일 총리 대행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지만 이미 바이러스는 온 국토를 스멀스멀 파고들고 있다. 이쯤되다보니 눈치를 살피던 박원순 서울시장이 스스로 대응책을 내놓고 정부를 향해 눈을 부라리기 시작했다. 정치인의 감각은 바이러스보다 더 예민하다. 틈을 비집고 떨어진 지지율을 만회하는데 이만한 호재는 없다. 갈팡질팡하는 정부나 이 틈에 정치적 입지를 곧추세우려는 정치인이나 딱하긴 마찮가지다.

 메르스 감염자가 확산되면서 경제·사회적 파장은 벌써 엄청난 속도로 커지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잇달아 한국 방문을 취소하고 있다. 상당수 학교가 휴교에 들어갔고 학부모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몇몇 기업은 공장이나 사무실을 임시 폐쇄할 것을 검토 중이다. 메르스가 병원에서 감염되는 것을 보고 병원 진료 예약이나 입원을 취소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대체로 감염권에서 먼 곳인 울산도 괴담이 번지고 소문이 무성하다.

 세계 많은 국가들이 이번 사태를 통해 한국의 의료 수준과 대응 능력을 예민하게 살펴보고 있다. 메르스 사태는 안으론 국민의 생명이 달린 문제이고, 밖으로는 나라의 체면이 걸린 문제다. 한마디로 국가적 비상사태가 아닐 수 없다.

 이번 사태의 초기로 되돌아 가보자. 감염이 확인되고 감염자나 전파 의심자가 가시권에 있을 때 일부 의심자가 중국과 홍콩으로 떠났다. 의사가 말리는데도 중국에 간 의심자나 그와 같은 비행기를 탄 한국인 일부는 홍콩에서 격리를 거부하다 붙들려가는 일도 벌어졌다. 메르스 확진 환자와 비행기에 동승했던 승객 중 관광을 위해 홍콩에 간 여성 두명은 홍콩정부의 격리와 검사를 거부하다 추적을 통해 반 강제로 격리되는 일까지 있었다. 당장 홍콩이나 중국에서는 '한국인들의 시민의식이 겨우 이 정도냐'며 비난이 쏟아졌다.

 공공의 질서나 안전을 위한 법은 나 아닌 남이 지켜야 하는 것이라는 이기주의가 벌거숭이가 된 채 국제적인 망신을 당한 셈이다. 시민들의 작은 일탈을 눈감아주는 일이 반복되면서 규칙과 질서를 어기는 사람들이 오히려 고개를 들고 큰소리치는 것도 일상사가 됐다. 전염병이 삽시간에 국경을 넘는 시대다. 최근 몇 년 사이만 해도 사스, 신종플루, 에볼라 같은 전염병이 세계를 떨게 했다. 수습이나 대책보다 뭘 해야할 지도 모르는 정부의 무능에다 나만 편하면 된다는 식의 시민 의식이 제대로 만났다. 이런 사회라면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

 국가적 재앙이라고 떠들어대지만 이미 우리 사회는 정부의 목소리를 신뢰하지 않는다. 병원 공개가 무슨 금기가 되다 뒤늦게 공개하는 소동이나 비상대응 단계 격상 문제의 신중모드는 재앙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부적절해 보인다. 주무장관은 연일 분주하긴 하지만 중심을 못잡고 대통령은 창조경제에 매진하다 언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가까운 과거의 일이지만 에볼라로 비상 상황이 됐던 미국에서는 에볼라 확산을 초기부터 국가적 대응 과제로 잡아나갔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당시 에볼라 출혈열 환자를 돌보다 에볼라에 감염된 간호사가 치료받고 회복되자 백악관으로 불러 포옹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찍은 사진을 언론에 공개했다. 당시 미국 사회는 에볼라 공포와 괴담이 난무했다. 미 국립보건원 연구소장도 에볼라 간호사와 포옹하는 장면을 보여줬고, 뉴욕 시장은 에볼라에 감염된 의사가 들른 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다.

 우리 대통령도 병원을 찾았다. 지난 5일 국립중앙의료원을 찾아 병상 운영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고, 의료진과 민간 전문가의 의견을 들었다. 우리 대통령이 메르스 환자 격리병원을 방문한 것은 첫 번째 메르스 확진 환자가 발생한 지난달 20일 이후 16일만이었다. 그 사이 우리 사회는 메르스 괴담이 황사처럼 퍼졌고 지방정부가 중앙정부에 삿대질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문제는 매일같이 번지는 메르스 바이러스가 아니다. 바이러스야 어떻게든 잡을 수 있지만 이번에도 드러난 것처럼 우리 사회에 만연해버린 정부에 대한 '불신 바이러스'를 잡는 일이 더 급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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