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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잠출 울산학연구소장

1855년 울산군수 심원열이 배를 타고 태화강 서지(西池)를 찾아 나섰다. 강 한복판에 가득한 연꽃을 감상하기 위함이었다. 서지는 당시 태화강에 있었던 큰 연못이다. 그곳에는 섬이 있고 연꽃이 매우 번성해 시인묵객들이 줄을 이었고 명성은 태화루에 버금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볼품없는 몇 개의 연꽃만 남아 있어 심군수는 크게 실망해 주민들에게 까닭을 물었다.
 주민들은 "예전에 연꽃이 못을 가득 메워 향기가 사람들에게 물씬 풍겼다. 고을 태수가 술잔을 들고 꽃을 감상했고 오가는 사람들이 술 마시지 않은 이가 없었고 시를 읊조리지 않은 이 없었으니 연못의 명성이 어찌 '태화루' 다음이었겠는가!"라고 회상했다.
 알고 보니 1853년 울산에 흉년이 들어 주민들이 연근을 먹기 위해 모두 채취해 가는 바람에 뿌리 채 없어졌다는 것이다.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 사이트에 공개된 심원열의 '서지하화기(西池荷花記)'의 내용이다.
 이 책에는 또 방어진 앞바다에 출몰한 3척의 이앙선에 대한 급한 보고문과 함께 소나무 봉산으로 유명했던 대운산에 소나무가 모두 사라진 것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의 글도 있다.
 '대운산은 수목이 하늘을 찌를 듯하고 아름드리가 많아 호서의 안면도보다 못하지 않았다'면서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들이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으면서 민둥산이 되었다'고 탄식해 사물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백성을 굶주림에서 구제하고 다시 서지에 연꽃을 심고 대운산에 소나무를 울창하게 만드는 일이 목민관의 할 일이며, 이러한 소망을 반영한 글이라는 해석이다.
 울산 8경을 새로 짓기도 했던 심 군수는 객사 앞 태화루에 오르내리며 기문을 남겼는데 가끔 태화루의 이름에 대해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태화루 이름의 유래는 알지 못한다면서 '크게 화합하란 의미'로 태화루란 이름을 지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심원열의 책과 함께 강와 임필대의 '유동도록(遊東都錄)'과 권상일의 '청대일기'도 공개하고 있다.
 강와는 1767년 가을, 경주를 유람한 뒤 언양에 들러 하루를 묵었다. 집청정에서 편액을 감상하면서 시를 남기라는 권유에 자신은 재주가 없어 사양한다면서 반구대의 경승은 마치 귀신이 새긴 듯이 형용할 수 없는 장관이라고 묘사했다.('반구대를 유람하다')
 청대가 울산부사로 부임한 지 이듬해인 1736년, 범서에 살던 공씨 성을 가진 양반이 족보 4권을 들고 권 부사를 찾아왔다. 학식이 뛰어났던 청대는 족보를 읽고 울산에 공자의 후손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청대일기' 중)


 지금 대운산은 산림청이 치유의 숲을 조성하겠다고 한 데 이어 울산시가 수목원을 만들겠다고 해 소유주들과 다투고 있다. 태화강에는 연꽃은 커녕 고구마 섬(중도)도 사라졌다. 하류의 합도나 대도 역시 모두 흔적이 없어졌다. 합도는 모래채취를 위한 사리사욕에 의해 파헤쳐진 뒤 체육관으로 둔갑했다는 일부 증언도 있다.
 여름 날 향토에 관한 자료를 찾아 틈틈이 읽는 것이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마는 울산 자료를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에서 겨우 찾아야 하는 현실은 가슴 아픈 일이다.
 지금 울산에는 '문화'란 단어를 내세운 구호가 넘치고 외형은 요란하다. 그러나 '울산학'은 그 '문화'의 귀퉁이에도 자리가 없고 외면당하고 있다. 족탈부족이겠지만 정신문화에 관한 안동시의 '문화행정'을 배웠으면 한다. 다만 이것이 혼자만의 소망에 그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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