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는 참 바보다. 6,000~7,000년 전에 새겨진 암각화를 아직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공개된 지 45년동안 보존문제 조차도 해결 못하는데 더 말할 필요가 없지만 원판 해석은 제대로 해야 한다. 누구는 축제를 개최하고 누구는 물막이 공사를 막고 있거나 예산을 허비하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반구대 암각화 두 개의 그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와 눈길을 끈다.

 고래를 부르는 바닷말 나팔(kelp horn)을 불고 있는 남자 그림과 우미악(Umiak)이라 부르는 가죽 배(skin boats)를 탄 사람 그림이다. 우미악은 나무 뼈대에 바다표범의 가죽을 씌운 에스키모인의 작은 배를 말한다(2012년 10월 필자 칼럼). 지금까지 반구대 암각화의 '피리 부는 남자'는 딩각이나 긴 대 피리를 부는 것이란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대해 고래문화가 있는 태평양 연안을 필드워크한 김성규 씨는 호피 인디안들의 코코펠리(Kokopeli) 피리와 유사한 켈프 나팔이란 논문을 발표했다(고래문화학회). 논문에 따르면 남근을 드러내고 코코펠리를 부는 암각화는 태평양 연안 다른 나라에도 많이 있다. 또 고래가 나팔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고래를 부르거나 유인할 때 켈프 나팔을 분다는 것이다.

 켈프는 미역과 같은 해조류로 긴 뿌리 대공으로 만든 나팔은 지금도 태평양 연안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또 얼마 전 아메리카 인디언이 호주 허비 만(Hervey Bay)에서 피리 연주로 혹등고래를 불러 함께 노는 모습이 유투브 영상에 업 로드 되기도 했다. 반구대의 배는 가죽 배라는 주장은 어떤가. 선사 시대의 배는 어떻게 생겼는 지를 알기 위해 반구대 배 그림을 보니 얼핏 카누와 비슷하다. 신석기 시대 혹은 청동기 시대에 제작된 반구대 암각화에는 4개의 배가 있고 여러 사람이 타고 있다.

 고래잡이로 보이는 배에는 무려 18명이나 타고 있고 11명이 탄 배도 보인다. 이것은 암각화 조성 당시 포경을 할 수 있도록 배의 규모가 더 커졌다는 뜻이다. 반구대의 이 배들이 마상이 같은 통나무 배가 아니라 사실은 가죽 배였다는 것이 세계전통고래문화연구소 김성규 회장의 주장이다. 신라 시대까지 우리 조상들이 가죽 배를 사용했던 전통이 있었는데 고려와 조선을 지나면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동물 뼈와 가죽 배로 만든 'Skin-on-skeleton' 카약은 지금도 알라스카 이누이트인들이 사용하고 있다.

 옛 기록에는 가죽배를 혁선, 피선, 우피선(牛皮船), 자피선(者皮船), 과피접 등이라 불렀다. 고려시대 충숙왕 때(1323년), '혁선으로 물을 건넜다(革船渡河)'란 기록이 있다. 동사강목(東史綱目)을 비롯해 익제난고(益齋亂稿)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문선(東文選), 경암집(絅菴集), 자저(自著)에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가죽 배를 타고 강을 건넜던 사실이 확인된다. 성종 13년(1482년) 5월에 '야인들이 가죽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와 사냥을 했다'와 6월에 '비록 물이 불었다고 하더라도 말을 탄 사람들이 가죽 배(皮船)를 몰래 들고 다니니 노략질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혁선(革船)이 피선(皮船)으로 한 글자만 바뀌었다.

 세계전통고래문화연구소는 대중에게 반구대 암각화의 가죽 배를 입증해 보이기 위해 복원작업을 시작했다. 소재는 편백나무와 고래뼈, 소 가죽이다. 10월까지 완료해 공개하고 바다와 강물에 띄워 실용화하겠다니 '2015년판 가죽 배'가 기대된다. 어느 분야든지 한번 굳어진 학설을 바꾸기는 어렵다. 기존 학설을 뒤엎을 만한 반증을 제시하기도 어렵지만 고정 관념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어 더욱 그런지 모른다. 그래서 발상의 전환과 비교문화 인류학 연구가 필요하다. 반구대 암각화의 피리 부는 남자와 가죽 배 그림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해석, 우리는 어디에 방점을 둬야할까?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