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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딸아이가 취업을 해서 집을 떠났다. 대학교를 타지에서 다녔기 때문에 짐을 싸는 데는 이골이 났지만, 이제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출가와 독립의 첫걸음이라 유난히 더디게, 꼼꼼히 짐을 쌌다. 하지만 딸아이는 결국 베개를 떨구고 갔다. 나는 떠나기 며칠 전부터 여행 중이어서 딸의 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딸은 의도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체취가 담긴 물건을 어미 곁에 남겨두고 떠난 것이다. 딸의 베개는 높지도 낮지도 않게 편안히 머리를 받쳐주어서 나는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편백나무 베개 대신 딸의 베개를 베기 시작했다. 그리고 낯선 곳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딸을 생각하며 마음 속으로 응원을 보내곤 한다.

 그러고 보면 베개는 쓰임새로 보나 모양으로 보나 사람 사이의 정을 나타내는 강렬한 물건이다. 특히 남녀 사이의 정을 말할 때 베개만한 것이 또 있을까. 우리 시 사상 가장 에로틱한 시로 꼽히는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정든 님 오신 날 밤이거든 굽이굽이 펴리라'는 황진이의 시조는 사실 원앙을 수놓은 두동베개를 갖추어야 품격과 낭만이 더해진다. 원앙은 금슬이 좋은 새로 알려져 있어 부부가 함께 베는 길쭉한 두동베개엔 흔히 원앙이 수 놓인다. 또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이나 연꽃, 국화, 복을 상징하는 박쥐, 혹은 나비나 태극 문양으로 베갯모를 수놓아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하긴 사랑하는 남녀 사이라면 금실, 은실로 꾸민 베개가 대수겠는가. 정인이 받쳐주는 팔베개 하나로도 두근거리고 세상을 다 가진 듯 충만할 것이다. 하지만 팔베개는 엄마가 받쳐주는 것이 가장 좋다. 어린 시절 잠이 안와 칭얼거리면 엄마는 바쁜 가운데서도 옆에 누워 팔을 받쳐주고 가슴을 토닥거리며 재워주셨다. 엄마의 냄새는 짭짤한 땀 냄새라도 좋아서 나는 안심하고 이내 혼곤한 잠 속으로 빠져 들곤 했다.

 베개는 또한 휴식을 의미한다.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우리는 누워서 잠을 청하거나 뒹굴거리며 휴식을 취하는데 이때 베개는 숙면이나 휴식을 돕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은 보통 하루의 삼분의 일을 잠을 자면서 보내기 때문에 베개의 재료나 모양새는 건강과 직결된다. 그래서 솜 외에, 메밀, 편백, 좁쌀 등을 베갯속에 넣고, 나무, 대나무, 라텍스 등 여러 재료로 베개를 만들기도 한다. 베개가 편안해야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고 건강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휴식이 지나치면 나태나 안일에 빠지기 쉽다. 그러한 나태나 안일을 경계하기 위해 딱딱한 돌베개를 베고 눕기도 한다. 성경의 창세기에는 형 에사오의 노여움을 피해 달아난 야곱이 들판에서 돌을 베고 잠을 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긴급한 상황에서 아무 것도 없이 도망친 야곱이라 당연히 베개도 챙기지 못했을 테고, 야곱은 돌을 베고 누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때 돌베개는 야곱의 고난을 상징한다. 그날 밤 야곱은 꿈을 꾸는데 하늘로부터 사다리가 내려오고 하느님의 천사가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내가 너를 지키며 너와 함께 하겠다'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 이에 잠을 깬 야곱은 자신이 베고 자던 돌베개로 제단을 만들고 예배를 드린다.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든 하느님의 성전임을 발견한 것이다. 이때 돌베개는 축복이자 새로운 출발의 상징이다.

 사상계 발간인인 장준하는 이러한 돌베개의 의미를 차용해 자신의 책 제목을 '돌베개'로 삼았다. 그는 '돌베개에 부치는 말'에서 "결혼 일주일 만에 남기고 떠난 내 아내에게 일군탈출의 겨우 그 암호로 약속하였던 말"이 '돌베개 이야기'였다고 하면서, "'돌베개'를 베고 중원 6,000리를 걸으며 잠을 잤고, 지새웠고, 꿈을 꾸기도 했다. 나의 중원 땅 2년은 바로 나의 '돌베개'였다. 아니 그것이 축복받는 '돌베개'여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말로 야곱의 돌베개를 인용한다. 장준하는 일본군에서 탈영해 7개월 간 2,500㎞라는 엄청난 거리를 이동해 광복군에 합류하는데, 그때 그를 지탱하게 한 것이 바로 고난과 축복을 의미하는 야곱의 돌베개였다. 나태와 안일을 경계하며 부단히 자신을 채찍질하는 베개인 것이다.

 돌베개든, 팔베개든, 원앙침이든, 베개는 우리의 머리를 받쳐주어 좀 더 편안히 눕게 해준다. 물건으로 치면 엉덩이를 받쳐주는 의자, 사람의 몸으로 치면 온몸을 받쳐주는 다리나 발과 같은 존재이다. 거기에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희생이 있다. 더구나 샴푸 향기든 땀 냄새든 가장 내밀한 사람의 체취가 묻어나는 물건이다. 인정과 사랑을 얘기할 때 항상 베개가 등장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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