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울산수필가협회장·울산예총 사무처장

얼마나 그리웠으면, 얼마나 애달팠으면 붉은 꽃이 찢기듯 갈래로 피었을까.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조각난 사랑의 표현일까. 상사화로 불리는 꽃무릇을 보고 온 날 그 꽃에 얽힌 슬픈 사랑 이야기가 한 사내를 쉽게 잠들지 못하게 했다.

 지난 가을초입 꽃무릇 축제가 열리고 있는 전남 함평 용천사를 갔다. 버스 안에서도 그냥 그렇고 그런 축제이겠거니 지레 짐작만 했다. 새벽에 울산을 나서서 거의 6시간이 걸려서 용천사에 닿았다. 함평을 알리는 팻말이 나올 무렵부터 길가에 코스모스 대신 꽃무릇이 피어있었다.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용천사 주차장에서부터 용천사 가는 길 양편에 꽃무릇이 군락으로 피었다.

 "이렇게 많은 꽃이…"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용천사를 중심으로 꽃무릇이 산 전체로 불붙은 것처럼 피었다는 것에 대해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꽃무릇 축제가 열리는 기간에는 전국에서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조용하던 절이 번잡한 도심을 방불케 했다. 모두들 카메라에 꽃무릇을 담기위해 사진을 찍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용천사 사천왕문을 들어서자 꽃 무릇 자생지를 알리는 안내판이 여러 곳에 있다.

 이맘때 해마다 용천사는 꽃무릇 축제가 열린다. 때를 놓치지 않고 찾아온 것이 큰 행운처럼 여겨졌다. 꽃무릇은 잎과 꽃이 서로 볼 수 없어 상사화로 불린다. 비 내린 후 자라는 죽순이나 고사리처럼 한순간 30㎝에서 50㎝로 꽃대를 밀어올린 후 산 나리꽃 형태로 꽃을 피운다. 산 나리꽃과 다른 것이 있다면 꽃잎이 갈 갈이 찢겨져 있고 이파리가 없는 것이다. 그냥 꽃대로 장대처럼 올라와서 그 끝에 꽃을 피운다. 꽃 색은 혀를 깨문 핏빛이다. 가슴에 선혈이 낭자한 섬뜩한 느낌이다.

 꽃무릇을 상사화라고 하는 것은 꽃이 지고 나야 잎이 나기 때문이다. 꽃과 잎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사랑은 애절하다. 살다보면 들추기가 쉽지 않은 아릿한 사랑이야기가 누구에게나 있다. 말 못하고 가슴만 두들기는, 그래서 가슴에 시퍼렇게 멍이 든, 그런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상사화라는 말만 들어도 심연에서 그리움이 샘물로 솟아날 것이다.

 사람들은 수많은 사연들로 인해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을 그리워하면서도 살듯이 꽃무릇도 꽃과 잎이 영원히 만날 수 없음의 슬픔을 안고 피었다가 진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애간장이 끊어지는 피눈물 사랑이기에 호사가들은 꽃 무릇에 상사화라는 이름을 붙였는지도 모른다.

 가만히 꽃무릇을 보고 있으면 꽃 색깔도 어찌 이리 고울까싶다. 붉은 색인 것 같은데도 연보라색이 겹쳐져서 바람이 꽃대를 흔들 때 마다 분위기가 바뀐다. 상사화는 끝까지 혼자 삭이는 사랑을 해야 하는 얄궂은 운명을 타고 났다.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형벌이다. 꽃무릇은 잔인한 사랑의 흔적을 드러냄으로서 꽃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옛사랑에 절규토록 한다.

 꽃무릇에 정신을 빼앗겼을 때 연인들이 돌팔매질 하듯 한마디를 던졌다.
 "사랑이 이 정도는 돼야 한다"고….
 "뭐야 꽃 무릇은 사랑이 아니라 형벌인데도…" 방패로 막듯 입안에서 한마디를 웅얼거렸다.

 아무리 남의 일이라도 너무 쉽게 말하는 것 같다. 사랑은 따뜻해야 한다. 온기가 넘쳐야 한다. 꽃무릇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님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꽃 무릇 사랑은 슬픔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밤 모두들 떠나고 난 뒤 꽃 무릇은 화려한 몸짓으로 어둔 밤을 홀로 지새워야 한다. 그것이 타고난 운명이다.

 밤이 깊었다.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대중가요의 한마디를 빌리지 않더라도 꽃무릇은 보는 이의 가슴앓이에 수많은 생채기를 만들어낸다. 오늘 낮에 본, 손잡고 가는 다정한 연인들, 그들은 아픈 상처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꽃무릇이 지천으로 핀 용천사에서 나도 실은 오래 전의 기억들로 가슴이 아릿해진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