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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울에서 돌아오던 중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을 때다. 평일인 데도 휴게소 안은 마치 설 대목장처럼 북적댔다. 주차장은 각처에서 달려온 관광버스가 사열해 있고 식당가·화장실은 초만원이었다. 화장실 앞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주변 사람 대부분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붉은색 상의에 예쁜 모자와 스카프로 치장한 것이 '단풍놀이'에 나선 이들이 분명했다.

    그런데 저만치 화장실 안 한쪽에 마련된 거울 앞 풍경에 자꾸 시선이 꽂혔다. 그 복잡한 공간에서 얼굴을 거울에 갖다 대고 연신 분첩을 토닥거리고 립스틱을 바르며 유난을 떠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힐끔힐끔 쳐다보자 오히려 '나 예뻐?'하는 표정이 더 의아했다. 은연중에 안 사실은 모두가 칠십 대 '시니어 단체'라는 사실에는 더욱 관심이 갔다.

 서로 무릎관절이 탈 났다고, 허리가 아파 죽을 맛이라고 하소연 하면서도 시선은 연신 거울 속 당신 얼굴을 분칠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여자는 천성적으로 죽을 때까지 '예쁘다' 소리를 좋아한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다. 취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모두 발그레한 얼굴에 흥분돼 화장실을 나서는 그들 등 뒤로 '여자'를 읽었다.

    그랬다. 육신은 이미 인생이란 가지에 달린 단풍잎 신세가 됐다지만, 곱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젊어 한때 펄럭거리던 에너지는 가족한테 다 내어주고 낡은 몸뚱이는 소슬바람에도 꽃비로 지는 단풍이파리 숙명인 걸 왜 모를까. 붉은 옷에 분칠하고 싶은 것은 아직은 '여자'라는 솔직한 본능이리라. 광장을 가로질러 우르르 옮겨가는 풍경은 마치 샛바람에 팔락거리는 철부지 소녀들의 치맛자락만큼이나 예쁘고 귀여웠다.

 끼리끼리 어깨를 비비며 작은 우스갯소리에도 아이처럼 깔깔 맞장구를 친다.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라는 유행가에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몸짓까지 해가며 열창한다. 그들의 유흥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함께 어우르고 쓰다듬었다. 그 세대 아낙들은 유교적인 가부장제에 억눌리고 무시 아닌 무시를 당해가며 지낸 질곡의 삶이었다.

    한 집안에 며느리는 부모 봉양이 당연했고 아랫세대한테는 섬김 받지 못한 억울한 시대를 산 증인이다. 가난했던 살림살이에 에오라지 가족만을 위해 젊음을 송두리째 반납하느라 정작 본인 인생은 대책 없는 미래였다. 어느 날 문득 거울에 비친 늙은이가 자신인 것에 회한이 밀려왔을 가련한 이들. 서리가 한 움큼씩 내린 푸석하고 성근 머리카락에 수분을 잃어버려 마치 풀 먹인 삼베수건 쥐어짠 듯 자글자글한 인상이 절로 한숨짓게 했을 것이다.

 현대는 여자도 사람 대접받고 사는 시대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남자만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 산 것을 듣거나 보아온 나는 부정하지 않겠다. 누가 그들의 지난했던 삶을 감히 알아줄까. 스스로 안타까워 몸부림치듯 법석을 떨어보는 단풍놀이, 그 유흥은 단순한 '놀이'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코끝이 다 찡하다. 어쩌면 신명 같고 어쩌면 억눌린 한을 쏟아내는 것 같은 그 몸짓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그들은 이미 달리는 관광버스 안에서 몇 순배쯤 술잔을 돌렸을 것이다. '고장 난 벽시계' 유행가는 절규이듯 가슴으로 외쳤을 거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신명으로 뒤뚱거리다가 헐렁해진 허리춤을 몇 번이나 추슬렀을 거다. 본래 우리 민족은 춤추고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기질은 타고났다고 하지 않는가. 가슴은 여자이고 청춘인 것을 감히 누가 나무라고 싶을까. 그렇게 한참이나 정신을 팔고 있다가 나는 하마터면 울산행 버스를 놓칠 뻔 했다.

 나 역시 인생의 가을이 진행형이다. 그래서일까. 유독 가을 내내 근처 문수체육공원 산책길을 조석으로 드나들다시피 한다. 호반광장 산책로를 따라 빨강색물감을 쏟아부은 듯한 단풍은 곱기보다 요염타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바사삭' 튀긴 감자칩처럼 마른단풍으로 만들어진 마로니에 낙엽거리는 사색에 젖게 하는 마력 같은 것이 있다. 그 길 끝자락에는 대숲과 누렇게 물이든 칠엽수 숲 여기저기에는 나무의자를 내어주며 편히 쉬어가라 한다.

    여기서는 누구라도 엉덩이 붙이고 느긋하게 휴식에 들어도 좋을 것이다. 왠지 거기서는 법력 높은 고승이나 선비와 함께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느릿한 걸음으로 오솔길을 지나고 다시 비스듬한 언덕배기에 이르면 노란 물든 은행 숲이 축제 분위기를 이룬다. 노란색 카펫을 사방으로 깔아놓은 그 속으로 나는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듯 우아하게 거닐다가 시간 가는 것도 잊는다. 이러니 구태여 먼 곳을 찾는 '단풍놀이'가 내겐 사치일 수밖에.

 가을도 단풍도 끝자락이다. 이 가을, 그대의 나무는 어떤 색깔로 물들이고 있는지 묻고 싶다. 가지를 떠나 대지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 남은 에너지를 죄다 길어 올려서라도 인생이란 임의 단풍을 곱게 물들여 보시길…. 거실 벽에 걸린 달력 한 장이 O. 헨리가 그려낸 마지막 잎사귀처럼 간당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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