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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 중 내가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요양 병원에 계셨는데 깨끗이 씻긴 아버지의 손과 발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 손발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장수하신 편이지만 평생 지병을 앓으셨는데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나만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웃을 때 살짝 튀어나오는 광대뼈까지 남김없이 물려받았다. 덕분에 나는 병원 출입이 유난히 잦고 골골거리는 편인데 한 달 전에 그 일로 엄청난 일을 겪었다.

 한 달 전에 했던 피검사 결과를 보러 간 날이었다. 피검사 결과표와 일 년 전에 했던 건강검진 결과 동영상을 한참 들여다보던 주치의가 끔찍한 소리를 했다. 암 수치가 정상수치보다 엄청나게 높다는 것이다. 암이 의심된다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생전에 앓아 오셨던 그 병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얼굴을 들고 눈을 껌뻑일 기운도 없을 만큼 온몸에 힘이 빠졌다. 사형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피검사를 다시 한번 해보면 안 되겠냐고 했더니 주치의는 의미 없는 일이라며 더욱 절망스러운 분위기로 몰아갔다. 그 뒷이야기는 해서 뭐할까. 우리 집은 초상집이 되어 버렸다. 입원 날짜를 잡아두고 기다리는데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피검사를 할 즈음 건강 상태가 최악이었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암은 너무했다 싶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가 암이라니! 물론 나라고 암에 걸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아무런 자각 증세도 없고 주치의 말대로 살이 빠지거나 컨디션이 지속적으로 좋지 않는 그런 작은 변화도 없었다.

 남들이 그러듯 큰 병원으로 가보기로 했다. 당장 결과를 알고 싶었지만 절차는 왜 그렇게 복잡한지 병원을 2주일에 걸쳐 4차례 오간 뒤 겨우 결과가 나왔다. 의사는 내 얼굴이 누렇게 떴다는 우스개소리와 함께 검사 결과표를 내밀었는데 의심했던 암 수치는 지극히 정상으로 나왔다. 결국 한 달 동안의 끔찍했던 악몽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그저 의미 없이 보낸 날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럴 리가 없다 했지만 그 초조한 시간 속에는 난생 처음 죽음을 준비한 시간도 있었다. 나도 언젠가 죽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 젊고 좋은 날에 내가 죽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암일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죽음이 그저 두려웠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죽음이라는 단어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뭐랄까. 잘 죽어야 한다는, 나의 일생을 보기 좋게 마무리하여야 한다는 생각 같은 것이다. 죽음이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내 옷자락을 불쑥 잡아당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죽음을 삶의 일부라고 하지 않던가. 그 말의 의미가 뜨겁게 와 닿은 시간이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최인호 소설가는 6개월 시한부 삶을 살게 된 자신이 참으로 행복하다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는 이에 비하면 얼마나 다행이냐며, 가족들과 친지들과 그리고 책과 써오던 원고와 세상의 모든 정든 것들과 인사를 나눌 말미를 얻은 것이 감사하다고 했다. 작가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생각으로는 20년을 더 앞서 산다고 한다. 더 깊은 상념과 세상을 바라보는 혜안을 가졌다고 하는데 나는 20년을 넘게 작가 생활을 하고도 그런 경지를 알지 못하니 부끄럽기만 했다.

 오래전 암보험에 가입했지만 내가 암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불쾌한 생각인 듯 버려두고 살았다. 암이 아니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것들과 이별을 상상해 보아도 결국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자식과의 이별이었다. 욕심을 버리고 버리고 또 버려도 끝내 버릴 수 없는 것이 자식이었다.

 아직도 마음에 어린옷을 벗지 못하고 사는 내가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 서니 어디서 이런 담대한 마음이 생겼는지 자식들은 지켜주고 죽어야한다는 생각에 절망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하필 낙엽이 지는 이때, 죽음이라는 상자를 주머니에 넣고 병원을 오가던 일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고통이었지만 이만한 성숙의 가을도 없었다. 건강에 소홀했던 날들과 소중한 사람들에게 무심했던 마음에 회초리 한 대 모질게 맞은 것 같다. 게으르게 바빴던 날들을 버리고 여유 있게 부지런하자는 생각으로 겨울 속에 서 있다. 이 겨울 추위와 인사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하다.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이 어제처럼 익숙하고 또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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