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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의 겨울 해는 노루꼬리만큼이나 짧다. 해가 이마에 걸리면 낮동안 녹아 질척거리던 마당이 다시금 얼기 시작한다. 처마 끝에 고드름이 송곳같이 서늘하고 잔뜩 흐린 하늘에 컴컴해진 집집마다 서둘러 호롱불을 밝힌다.

 일찍 저녁을 먹고 호롱불 아래 홀로 앉아 책장 넘기는 소리만 적요하던 밤. 소년은 '스스슥  삭삭' 뒷 봉창의 눈발 치는 소리에 가만 일어서 방문을 연다. 앞마당도 지붕도 하늘도 온통 하얗다. 마당의 나무들도 흰 눈을 깁스처럼 감고 서 있다. 세상이 온통 함박눈의 고요에 휩싸여 있다.

 방안에 화롯불도 사그라지고 식은 재만 남았다. 출출하고 뭐 요기 할꺼리 없나 궁금하던 끝에 숙제를 하다 마루에 나와서는 '어무이, 밀가루나 하늘에서 마구마구 퍼부어 주었으면 좋것네' 하면서 어머니가 거처하시는 안방으로 들어선다.

 "뭐 먹을 거 없는가 어무이"
 "녀석! 뱃속에 거지라도 들어 앉았남. 찰밥 남은 거 한 사발 있는데 먹을래"

 호롱불빛에 바느질을 하시던 젊은 어머니의 대답이다. 내가 작은방에서 건너온 속내를 읽으시곤 부엌으로 나가 찰밥 옹배기를 밥상 위에 꺼내 놓으신다. 마당 한켠에 있는 움집으로 가셔서는 항아리 뚜껑을 열고 동치미와 잘 삭은, 치렁치렁한 잎사귀가 그대로 달린 먹음직스런 무김치를 꺼내 오신다. 찬밥에 동치미, 벌건 무김치를 와삭거리며 먹는 아들의 모습을 어머니는 흐뭇한 눈길로 지켜보신다.

 눈발 치는 소리와 서늘한 동치미 국물, 찰밥은 최상의 궁합이다. 밥맛도 분위기가 좋으면 한결 더 난다. 창 밖에는 흰 눈이 펄펄 날리고 아랫목은 뜨끈뜨끈, 고구마 덕이 놓인 윗목은 냉돌. 어둠을 도려낸 것 같은 호롱불빛 아래 천지 사방이 유정해지고 어머니의 가르마 아래 반듯한 이마와 눈썹, 오뚝한 콧날을 처음보기라도 하는 양, 아들은 오래오래 바라다 본다.

 세상은 어쩌면 이리도 평화로울까. 적막강산의 마을에 눈 덮인 따끈따끈한 구들방. 까실까실한 새로 시친 이부자리에 뻗친 발에서 온기가 온몸으로 스물스물 전해오고 소년은 더없는 안온함을 느낀다. 새 둥지가 이리 포근할까. 양지쪽 벼 짚가리 속이 이리 아늑했던가. 살 얼음 낀 동치미 국물을 한 모금씩 마셔가며 찰밥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뚝딱 비우는 아들의 모습을 어머니는 대견한 듯 그윽히 지켜보신다.

 집집마다의 김장 풍경도 볼만했다. 입성도 변변찮아 옷깃 속으로 찬바람이 오소소 파고들던 그 겨울, 동네 우물터에서 두레박으로 찰박찰박 샘물을 길어서는 무를 씻고 노란 속고갱이 배추도 쪼개어 씻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아낙들의 손은 이내 곱아 발개져서는 소금을 쳐서 한나절 절여 두었던 김장 배추를 소쿠리에 건져서 집으로 옮겨왔다.

 남정네들은 양지쪽 담벼락 아래에 김장독 묻을 구덩이를 허리 높이까지 파고, 아낙들은 김장 배추의 속에다 무 생채, 양념 고추가루 버무린 것을 비벼 넣는다. 김칫독은 미리 정갈하게 씻어 말려 둔다. 이윽고 무를 큼지막하게 썩둑썩둑 썰어 양념과 버무린 무김치, 새벽부터 샘터에서 길어온 정한 샘물을 길어부어 소금 간을 한다.

 잎사귀도 자르지 않고 무를 그대로 넣은 동치미는 통고추를 그대로 동동 띄운 비주얼부터가 맛깔스럽다. 배추 무김치 항아리를 새끼줄을 걸어서 파놓은 구덩이에 조심조심 내리고 흙을 가장자리부터 채운다. 묻고는 볏짚으로 두툼하게 움집을 해서는 겨울나기를 했다. 불현듯 흰 눈이 무장무장 내린 움집에 동치미를 꺼내기 위해 고무신을 들들 끌고 가던 그 겨울의 시골 풍경이 그리워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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