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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수필가협회장·울산예총 사무처장

울산에 살면서도 겨울바다를 보러가는 날은 늘 가슴 설렌다. 울산에서 바다를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다보면 쉬운 일만도 아니어서 밥을 먹는 약속을 할 때는 바닷가 식당을 선택한다. 며칠 전 후배한테서 전화가 왔다. 날 잡아 점심을 먹자고 한다. 장소는 날더러 잡으라고 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약속장소는 바닷가 분위기 있는 식당이다. 아마 그도 바다가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내게 바다는 미움과 그리움이 반반 섞인 애증의 산물이다. 나는 산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으로 유학을 왔다. 그것도 기숙사에서 해운대 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학교였다. 창 너머로 늘 파란 바다가 보였다. 언젠가 한 번은 가봐야지 했다. 그러던 어느 주말 처음으로 학교 정문을 나서서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갔다.

 해운대 해수욕장은 은빛 모래가 눈이 부신 아름다운 해변이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그때는 모래가 파도에 쓸려나가면 타 지역에서 모래를 가져와서 보충하는 해수욕장이 아니었다. 해운대 해수욕장 모래는 조개껍질이 부서지면서 만들어지는 은빛 모래였다. 이곳에서 여름날 하루를 보내고 나면 그 해가 다가도록 은빛모래 흔적이 모공에 박혀 추억으로 남았다.

 아름다운 백사장을 게걸음으로 겅중겅중 걸었다. 파도가 쓸고 간 자리에 볼품없는 발자국을 찍어보는 것이 참 재미있었다. 그 이후 시간만 나면 해운대 해수욕장을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내가 왜 여기 있지'하는 의문이 들었다. 인문계고교에 진학한 친구들의 소식을 가끔 듣기 시작하면서 가슴 속 작은 갈등들이 몽실몽실 커지지 시작했다.

 나중에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됐다. 그렇게 잔인한 세월이 흘렀다. 중간에 여러 번 학교를 그만두는 것도 생각했다. 그럴 때마다 해운대 백사장을 지나 동백섬 인어상까지 뛰다시피 가서는, 오륙도 너머로 사라지는 선박들을 보면서 아픈 가슴을 달랬다. 그런 세월을 지내고 졸업을 했고 직장을 선택하면서 울산으로 왔다. 그 때부터 바다를 찾는 것이 버릇이 됐었는지도 모른다. 울산에서도 시간만 나면 감포행 완행버스를 타고 비포장 무룡산 고갯길을 넘었다. 정자에서 내리기도 했고 양남면 하서리 쯤 가서 내리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바닷가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다 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당시는 대학을 가지 못한 것에 대한 좌절감이 몹시 컸었다. 현장에서 기계를 잡고 서 있는 내가 무척 싫었다. 바닷가 몽돌 밭에 앉아서 수평선을 바라보던 날의 기억들이 가슴을 아릿하게 했던 날도 지금은 곰삭힌 추억이지만 그때는 늘 가슴에 싸한 바람이 불었다. 수렴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들뜨다보니 약속시간보다 내가 먼저 도착했다. 그가 올 때까지 바닷가를 걸었다. 날이 추워지면 바닷물이 거울처럼 투명하다. 바닷물에 비치는 내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겨울바다는 오래전 새겨진 문신 같은 그리움이 출렁이는 것 같다.

 하얗게 부셔지는 포말의 바다는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사연들이 아릿한 그리움으로 둔갑해 가슴 저리게 했다. 갑자기 담배 한 개비가 피우고 싶었다. 그것도 말보로라면 더 좋을 것 같다. "Man Always Remember Love Because Of Romance Over" "남자는 흘러간 로멘스 때문에 항상 사랑을 기억한다." 영문 첫 자만 따서 모은 '말보로'라는 담배이름은 이루지 못한 사랑의 부산물이다. 내게는 슬픈 사랑이 아니라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기억이다. 모처럼 혼자 걷는 겨울바다는 많은 기억을 들추게 했다.

 아릿한 기억들이 무수하다. 언젠가는 누구와 다투었고, 어떤 해는 직장 야유회를 갔다가 비를 쫄딱 맞아서 생쥐 꼴이 됐던 기억도 파도에 떠밀려 왔다. 산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수많은 질문과 질문들이 이어지지만 마땅한 정답은 없다.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다. 가끔은 추억이 그리워서 바다를 찾기도 하고 그냥 답답한 가슴을 안고 무작정 바다를 찾는다.

 오늘처럼 추운 겨울바닷가에서 생각하면 지난 세월 가슴 아파했던 일들도 대수가 아니다. 한 때 행복했던 시절도 그저 허허롭다. 도리어 안타까워서 발을 동동 굴렀던 때의 기억들이 조약돌 같은 추억이다. 살다보면 세월 속에 묻어둔 이루지 못한 이야기는 늘 끝이 없다. 날이 추워서 바닷가 작은 찻집에 들러보았다. 화목난로가 따뜻하다. 주인에게 점심식사 후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더니 그냥 웃었다. 바다는 파도가 점차 거칠어졌다. 식당으로 가다가 몽돌을 집어 들고는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던졌다. 순간의 일이지만 흔적이 없다. 이루지 못한 꿈들도 겨울바닷가에서는 모두가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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