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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드(미국드라마)열풍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을 꼽으라면 프리즌브레이크를 뽑을 것이다. 스코필드라는 주인공의 이름이 한국에서는 석호필이라고 불리며 인기몰이를 했다. 하지만 진짜 석호필이라는 한국이름을 가진 사람이 1919년 대한민국에 있었다. 바로 스코필드 박사이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3·1운동의 산증인인 F. W. 스코필드 박사(Frank William Schofield, 한국명 석호필)를 2016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스코필드가 한국 이름을 '석호필(石虎弼)'을 마음에 들어 했고 즐겨 사용했는데, 그 이름을 선택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 발음이 스코필드와 비슷할 뿐 아니라 철석같은 굳은 의지를 나타내는 '돌 석(石)', 강자에게는 호랑이 같이 무서운 사람임을 나타내는 '호랑이 호(虎)',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도울 필(弼)'의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코필드의 한국 이름 '석호필(石虎弼)'이 그의 인격과 삶을 대변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스코필드 박사는 영국 태생으로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세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교에서 강의하던 중 1916년 11월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자격으로 부인과 함께 내한하여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을 가르쳤다.

 스코필드 박사는 1919년 3월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기록으로 남기고, 일제의 비인도적 탄압에 맞서 싸웠다.
 특히, 화성 제암리와 수촌리를 직접 방문하여 참혹한 방화 학살 현장을 촬영하여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려 일본제국주의의 잔혹함에 대해서 낱낱이 파헤쳤다.
 스코필드는 같은 해 5월 서대문형무소를 찾아가 유관순 등 투옥된 독립운동가를 면회한 후 조선총독부에 고문과 비인도적 만행을 중단할 것을 촉구함으로써 한국의 상황에 대해 각국 언론에 동정과 지지를 호소했다.

 또한 스코필드 박사는 같은 해 8월 일본으로 건너가 극동 선교사 80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으며, 하라 수상을 면담하여 일제의 동화정책과 민족 차별을 철폐하고 한국인에 대한 강압과 만행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후 일제의 감시는 물론 살해 위협까지 받다가 1920년 4월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캐나다로 돌아간 뒤에도 강연을 통해 한국의 비참한 상황을 알리고 일제의 식민정책을 비판하였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한국을 지키는 든든한 파수꾼 역할은 한 것이다.

 한국이 독립한 후에도 스코필드 박사는 거의 해마다 3·1절 기념행사에 참여 한국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였다. 특히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짤막한 글에서 '1919년 당시의 젊은이와 늙은이들에게 진 커다란 빚을 잊지 마시오. 이 몇 마디는 내가 오늘의 조선 청년들에게 주고 싶은 말이다. 국민은 불의에 항거해야만 하고 목숨을 버려야만 할 때가 있다. 그럼으로써 일종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고 조금은 광명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우리의 3.1정신을 계속해서 이어받아 갈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이후 스코필드 박사는 심장석 천식으로 몇 차례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국립중앙의료원 입원 중 1970년 4월 12일 향년 81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위와 같은 업적을 치하하고자 1968년 정부는 대한민국의 자주 독립을 위하여 생애를 바친 스코필드 박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한국을 조국처럼, 한국인을 동포처럼 사랑한 스코필드 박사는 3·1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공적으로 소위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며 현재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어있다. 우리 역사에 있어서 1919년 '34번째 민족대표'가 있었다는 사실도 앞으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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