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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가

몇 살 때였는지 모른다. 또 읽었는지 들었는지 그에 대한 기억도 없다. 얼굴도 팔다리도 없는 그 이야기는 풍선같이 둥실 마음에 떠서 나를 지켜본다.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에게 전생을 비춰보는 커다란 거울이 있다고 했다. 그 앞에 서기만 하면 그 사람이 평생 어떻게 살아왔는지 환히 볼 수 있다고 했다. 그 거울에 비추어지는 업 중에서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지옥으로 보내고,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천당으로 보낸다는 이야기였다.

 어른이 된 후 그 거울이 불교에서 말하는 업경대(業鏡臺)라는 것을 알았다. 어릴 적 이 거울 이야기에 나는 몹시 겁먹었다. 희한한 게 착한 일을 했을 때는 생각나지 않던 이야기가 꼭 마음에 걸리는 일을 하고 나면 뚜렷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이 거울 이야기는 반백의 세월을 보낸 지금까지도 자꾸 내게 말을 건다. 너, 어쩔래? 이 정도는 봐주지 않을까? 타협하고 거래까지 하는 거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의 세월을 살고 있건만 이 고약한 거울은 여전히 나를 어린 애 취급을 하고 겁을 준다.

 더러 남에게 이로운 일을 할 때도 있는데, 그때는 모르는 척 하다가 양심이 따뜻한 아랫목처럼 편안하지 못할 때 나쁜 일 하나 추가요! 할까 겁도 나고 억울했다. 하지만 억울해 하는 마음조차도 죄가 될까 취소하고 마음정리를 하곤 했다.

 공책에 내 생을 일일이 기록하지 않았으니 선악 중 어느 쪽이 더 많은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준비도 없이 덜컥 저 세상으로 가서 그 무시무시한 거울 앞에 앉게 되면 어쩌나, 어줍잖은 잔머리로 묘책을 짰다. 바로 내 바르지 못했던 삶을 죽기 전에 실토하는 것이다. 종교적 고해성사는 싫다. 내 생의 옷을 입혀준 가족이나 친구에게 하면 어떨까. 가랑비에 옷 젖듯이 이미 죄로 다 젖은 내 삶은 아닌지.

 이실직고한다고 해서 죄가 덜어질까 마는 이승을 떠나는 내 발걸음이 좀 가볍지 않을까 해서. 훗날 더 늙어 죄에 대한 기억도 잊어버리고 얼씨구나 하고 그 거울 앞에 가 설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내 삶을 고백하고자 마음먹으면 꼭 울게 된다. 아직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살아갈수록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싶다.

    왜냐하면 가끔 나에 대한 평가가 왜곡되기 때문이다. 물론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지만 참 난감하다. 나를 부끄럽게 한 일 중에 두 개를 하자면 어느 행사 자리에서 소속된 단체 회장님께서 나의 프로필 소개를 하면서 "국가고시로 치면 사법고시, 행정고시를 다 합격한 사람"이라고 하신 거다. 물론 웃자고 한 소개였다. 난 놀라고 부끄러워 앞도 보이지 않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 소개말은 나의 게으른 창작활동을 오래토록 반성케 했다.

 또 하나는 유명 시인께서 나를 '생의 그린벨트'라고 부른 것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 비유가 있는지도 모르고, 바란 적도 없지만 감히 내가 그런 찬사를 듣다니! 분에 넘치는 부름인 줄 알면서도 크게 위로가 되었다.  의도치 않게 칭찬의 말을 들으면 부지깽이로 아궁이 속 불길을 뒤적여 보듯 나를 뒤적여본다.

 세상은 내가 보여주는 대로 읽기만 했을 텐데 도대체 약아빠진 내가 자신을 어떻게 포장했길래 과분한 말씀을 듣나 싶다. 내 죄를 하나 더 얹는 무엇이 아닐까 마음 조리다가도 심판자한테 이 마음을 알아 달라 아양 떨고 싶으니 나는 마음 굳건하게 그 거울 앞에 앉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엄마를 '생의 그린벨트'라고 하시네."

    나름 너희 엄마가 세상을 얄궂게 산 건 아니란다. 내심 인정해주길 바라고 자식들 앞에 말하니 자식 중 한 놈이 그런다.

 "생의 오염벨트를 잘못 말한 것 아닐까요?"

 웃음이 빵 터졌다. 얼른 인정했다. 정답입니다! 자식들은 나를 정직하게 비추는 살아있는 거울이니 틀린 말은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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