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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월 중순경인가, 통도사에 홍매가 피었다고 지인이 소식을 전해왔다. 그리고 한동안 잠잠하더니 삼월 들어선 갑자기 연이어 꽃소식이다. 산수유, 진달래, 개나리, 목련, 살구꽃과 벚꽃까지. 꽃들이 불꽃처럼 피고 있다. 아니, 폭죽처럼 터지고 있다. 어디 나무에 피는 꽃 만인가. 들판에도 파릇파릇 싹이 올라오며 냉이, 별꽃, 벼룩이자리 같은 작은 꽃들을 마구 피워내는 중이다.

 그런데 풀꽃은 나무 꽃과 달리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땅 위에 낮게 피어 고개를 숙여야 보이는 점도 있지만, 아마 나무는 봄에 꽃을 먼저 피우고 꽃이 진 뒤 잎이 나서 나무 꽃은 꽃 자체가 두드러지는 반면, 풀꽃은 대부분 잎이 먼저 나서 자라고 펴진 다음에 꽃을 피우기 때문인 것 같다. 가뜩이나 작은 꽃이 초록 잎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태주 시인의 시처럼 풀꽃은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 꽃들이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느낄 수 있다.

 나무 꽃은 아름답지만 사실 생김새는 단조로운 편이다. 주로 암술, 수술을 대여섯 장의 꽃잎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다. 갈래꽃이냐 통꽃이냐의 차이지 대개 그렇다. 매화가 그렇고, 벚꽃, 복숭아, 살구꽃이 그러하다. 그리고 진달래나 철쭉, 영산홍이 또 그렇게 비슷하다. 반면 풀꽃은 종류에 따라 그 모양이 하도 다양해서 어떻다고 규정하기가 힘들다. 민들레와 제비꽃, 토끼풀꽃을 비교해보라. 쑥부쟁이와 할미꽃, 금낭화는 어떤가.

 그런데 풀꽃의 재미난 점은 그 이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초롱꽃이나 은방울꽃은 귀엽고 사랑스럽다. 비단풀은 고상하다. 봄맞이꽃은 예쁘다. 꽃다지나 양지꽃도 괜찮다. 따뜻한 느낌이 든다. 닭의장풀이나 쇠비름, 개비름 하면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들다가 며느리밑씻개 하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리고 개불알꽃 쯤 되면 아, 이런 이름이 하며 얼굴 붉어진다.

 개불알꽃의 원래 이름은 복주머니란이다. 난초의 한 종류로 둥그렇게 늘어진 꽃모양이 복주머니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양에선 'Lady's slipper', 즉 숙녀의 슬리퍼라 부른다. 같은 모양을 보더라도 동서양 인식이 이렇게 다르다. 복을 염원하는 동양인의 의식이 풀이름에서도 느껴진다. 그런데 꽃 모양이 또 개의 그것처럼 보이기도 해선지 개불알꽃으로도 불리는 것이다. 개불알풀이라는 비슷한 이름의 풀꽃도 있다. 삼사월에 피는 작고 파란 꽃인데, 개불알꽃과는 각각 현삼과의 두해살이풀, 난초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아무 연관이 없다. 자세히 보면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워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의아해진다. 이름이 '거시기'해서 봄까치꽃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는데, 생뚱맞기는 마찬가지다.

 풀꽃에는 이런 개불알꽃 같은 이름이 제법 많다. 쥐오줌풀, 노루오줌, 말똥비름, 쇠똥나물, 개똥쑥, 애기똥풀, 방가지똥과 같이 배설물과 관련된 이름뿐 아니라, 쥐꼬리풀, 쥐방울털 같이 크기와 관련된 것, 미치광이풀, 거지덩굴, 도둑놈의 갈고리 등 사람의 성질을 본 딴 것 등 아주 다양하다. 생김새나 생태와 관련해 아, 그렇지 하고 수긍이 가는 이름이 있는가 하면, 아까 개불알풀처럼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것도 있다.

 그런데 화단에 가꾸는 꽃이나 나무에 피는 꽃에 비해 풀꽃에는 왜 이런 '천한' 이름이 많을까? 그저 발에 밟히는 흔하디흔한 것이라 그럴까? 농사를 방해하고 사람을 성가시게 하는 잡초라 여겨서인가? 하지만 이름과 관련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좀 다른 결론이 내려졌다. 예전엔 귀한 자식일수록 이름을 천하게 지었다고 한다. 귀신의 시샘을 피하기 위해서인데,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때라 천한 이름에는 오히려 자식의 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고종의 경우도 어릴 때는 개똥이라고 불렸다지 않은가. 그렇다면 풀꽃의 보잘 것 없는 이름은 역으로 그 고귀함을 나타나는 게 아닐까?

 봄 들판의 광대나물은 비록 이름은 광대지만 품격으론 어느 귀족 못지않음을 드러내는 것이고, 짚신나물은 어쩌면 지상에 강림한 신의 발자국인지도 모른다. '우수마발'(질경이와 먼지버섯으로, 흔하지만 유용한 약재)의 천한 이름도 썩어 거름이 되는 들풀의 본 모습을 표현한 것이 아닌지. 그렇다. 들풀의 성정은 똥오줌의 그것과 같이 땅을 기름지게 하는 것이다. 들풀이 있어야 땅이 산다. 들풀이 있는 땅이라야 살아있는 땅이다. 보잘 것 없음이 아닌 땅으로 돌아가 다른 풀꽃을 피우는 향기로운 거름이 되는 것. 그것이 풀꽃의 이름에 담긴 진정한 의미이고 아름다움이다. 풀꽃의 이름. 오래 생각해 보면 모두 예쁘고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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