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동문학가

살면서 힘을 빼라는 소리를 몇 번 들었다. 맨 처음은 수영 강사한테서였다. 온 몸에 힘을 준 채 물 위로 떠오르고자 용 쓰는 나에게 강사는 두 손바닥으로 내 허리를 받친 채 소리쳤다. 힘을 빼세요. 힘을! 두 번째는 운전면허학원 강사한테서 들었는데 핸들을 가루로 만들어 버릴 듯 힘 주는 나를 보다 못한 강사가 내 어깨를 누르며 말했다. 힘을 빼라니까요.

 의사 진료를 받을 때도, 헬스장에서 운동할 때도 힘 빼라는 소리를 종종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힘을 빼는 일이 몸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됐다. 몸에 힘을 빼듯 마음에도 힘을 빼야 할 때가 있었다. 요즘 말로 힘이라고 쓰고 욕심이라고 읽으면 될까. 그 힘이라는 것을 욕심이라는 단어와 바꾸어야 할 때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 교훈을 가장 생생하게 깨달은 때는 바로 글을 쓸 때였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남에게 칭찬 받는 글을 쓰기 위해 욕심을 가득 넣고 쓰다가 낭패를 본 적이 많았다. 욕심이라는 힘이 가득한 나를 발견하고부터였다.

 어린이 잡지사에서 기자 생활을 할 때였다. 창간 기념호에 축시를 쓸 기회를 얻었다. 그때 나는 막 동시로 등단한 신출내기 작가였는데 사장님이 내게 엄청난 지면을 허락하신 것이다. 내게 찾아온 절호의 기회였다. 잘 써서 점수를 따고 싶어 안간힘을 썼다. 독특한 형식을 구상키도 하고, 외국 동시를 본따는 등 몇날 며칠 머리를 쥐어짜 마침내 시를 발표했다. 감동이 있고 동심이 묻은 순수한 시를 쓰겠다는 생각 없이 그저 너 참 글 잘 쓰는구나 이 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원로 작가에게 눈물 찔끔 나는 쓴 소리를 듣고 말았다. 그러면서 말 끝에 글에 힘이 너무 들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요즘도 글을 쓰면서 힘이 너무 들어서 진도가 안 나가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재 몸무게보다 더 나가는 역기를 들기 위해 흰 가루를 묻히고 손바닥을 터는 역도 선수처럼 두 팔에 힘을 빼고 다시 시작한다. 그러면 글이 처음보다 가볍고 부드러워진다.

 새순을 피워낸 은행나무 거리를 걷다가 힘 빼라는 말을 떠올린 이유는 쓰려는 글이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고향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마을 이야기를 어린 아이의 일기처럼 솔직하게, 냉이 된장국처럼 담백하게 써보고 싶었다. 높은 나무에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보듯 내 고향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 고향이 멀거나 크게 변모해 속이 아린 것은 아니다. 동구 밖에 심어진 주인 없는 늙은 살구나무처럼 고향엔 엄마가 계시고, 논둑에는 쑥이 자라고 그 안에서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한 편의 서정시처럼 가득하다. 변한 것은 고향이 아니라 나일까. 마음에 이상한 논리 하나가 찾아와 있다.

 사실 엄마가 살고 계신 집은 남동생의 것이다. 엄마의 소유로 된 것은 밭 한 뙈기도 없다. 엄마의 소유로 된 것은 엄마의 몸뿐. 엄마는 참 무소유의 장본인이 됐다. 자매가 많은 우리는 늘 이런 이야기를 한다. 엄마가 돌아가시면 우리가 과연 고향에 올 일이 있을까? 고향에 올 수 있을까? 이런 말 끝에는 항상 두려움 같은 것이 몰려온다. 엄마가 계시지 않는 고향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지금 우리는 멀지 않는 날을 예측하며 두려움에 젖어 있다.

 고향에 관한 글 한 편 써놓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은 나날이 건강이 악화되는 엄마를 보면서 한 생각이다. 아침에 다녀간 자식이 첫째인지 막내인지 저녁이 되면 까먹는 엄마지만 그래도 엄마가 계시니 고향이 정답고 따뜻해서 이런 마음이 변하기 전에, 변심한 애인처럼 고향에 또 다른 마음이 끼어들기 전에, 눈물겨운 그리움이 없는 이 담담한 때에 고향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졌다.

 내 고향 이름은 '못안'. 한자로는 지내(池內)라고 쓰는데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가끔 '모단'으로 쓰고 읽는다. 마을을 빙 둘러 저수지가 여러 개 있어서 그 안에 가둬놓은 물을 농업용수로 쓴다. 높고 깊은 골짝에서 흘러 내려오는 굵은 물줄기가 없으니 그 넓은 논배미를 경작하기 위해서 저수지를 종교처럼 믿으며 산다. 물이 너무 귀해서, 물이 마르지 않고 솟아나는 우물을 가진 집이 가장 부러웠고, 시원한 강물을 품고 사는 친구들을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며 컸다. 가뭄이 지독했던 어느 해 봄에는 내가 다니던 중학교 전교생들이 모두 호미를 들고 논에 앉아 땅을 파고 모를 심었다.

 이듬 해 인근 군 부대에서 군인들이 몰려와 지하수를 파고 수도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올 때 마을 사람들은 잔치를 열고 춤을 추었다. 거짓말 같지만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나는 물에 굶주려 살았고 물이 잘 나오는 마을 총각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말했던 기억도 난다.

 그 고향 이야기. 물이 적어서, 없어서 늘 마르고 건조했던 이야기. 집들과 집들 사이 구부러진 길, 지붕 개수와 나무와 산과 밭과 논이 그대로인, 경치 좋은 곳에 오리불고기집 하나 생겨나지 않은 순진하고 얌전한 내 고향 이야기를 다음 지면에 써내고 스스로 짊어진 짐을 내려놓고 싶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