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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길 만개한 벚꽃의 봄기운이 소맷귀 속으로 스며들어오는 4월의 봄바람은 콧노래를 흥얼거리게 만든다.
 이런 봄의 매력을 매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행복함을 느끼기도 하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도록 헌신하신 우리의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에 대해 자랑스러움과 감사의 마음이 들기도 한다.
 4월 13일은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일이다. 또한, 4월 13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97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은 3·1운동 정신을 계승해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 나라의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선포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역사적 의의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제정된 국가 기념일이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총장을 지낸 '석농 오영선 선생'을 2016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오영선 선생은 부부(夫婦)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의 둘째 사위이다.
 어려서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며 국제정세에 눈을 떴으며,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07년 8월 일제의 군대 강제 해산으로 대한제국 장교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배일사상이 문제가 되어 퇴학 처분을 받았다.
 고국으로 돌아 온 선생은 1909년 이동휘의 초청을 받아 캐나다 그리어슨 선교사가 함북 성진군에 세운 협신중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소위 '이동휘의 교육생'이 되었다.
 오영선 선생은 1914년 독립군 장교 양성을 목적으로 이동휘가 길림성 부근에 세운 대전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대전학교가 폐쇄되자 1917년 1월 이동휘와 훈춘으로 옮겨 북일중학교를 설립하였고, 교사로 재직하면서 항일 구국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후 선생은 북간도와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여 교육계몽과 무관양성을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선생이 교육한 많은 학생들이 이후 간도와 연해주에서 항일무장 투쟁을 이끌어 국외항일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1920년 선생은 연해주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고 이동휘와 함께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옮겼다.
 또한 임시의정원 경기도의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임명되어 국무총리 이동휘의 활동을 보좌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임시정부에서는 개조파와 창조파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임시정부 개혁 논의가 한창이었다.
 선생은 1922년 독립신에 '신년의 신각오'라는 글을 기고하여 "우리는 독립운동가라는 의미 앞에서는 다 동지"라고 주장하며 화합할 것을 역설했다.
 선생은 국민대표회의 지지파와 정부 옹호파를 중재하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으나 결렬되자 독립운동계의 통일과 임시정부 개혁을 위한 정국쇄신운동을 벌였다.
 1924년 박은식 내각이 들어서자 오영선은 법무총장으로 선출됐다.

 선생은 정국쇄신을 위한 헌법을 개정하고 간도지역 정의·신민·참의 3부를 설득해 결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를 이끌어냈다.
 또한 선생은 국무령 김구 체제에서 군무장에, 이동녕 체제에서 외무장과 군무장에 임명되어 민족유일당 건설을 위하여 힘쓰기도 하였다.
 선생은 임시정부 국무원으로서 임시정부의 개혁과 대동단결을 주장하다 1939년 상해에서 지병으로 순국했다.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합을 주도한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특히 선생은 "우리는 독립운동가라는 의미 앞에서는 다 동지입니다. 우리 중에 큰 병이 무엇무엇 하여도 의심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사이의 비방, 질시, 시의, 저주의 대부분은 선의로 상대하는 중에서 개선될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선생이 남긴 이 말은 시간을 초월하여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꿰뚫는 송곳 같은 말처럼 보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처럼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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