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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과 밤은 빛의 있음과 없음으로 구별된다.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니라'(창1:5). 성경에서 확인된다.

 낮과 밤은 옥토끼와 금까마귀로도 표현된다.  '옥토끼 오르내려 늙음을 재촉하며 금까마귀 출몰하여 세월을 재촉한다(玉兎昇沈催老像 金烏出沒促年光).(自警文 중에서). 자경문에서 찾을 수 있다. 옥토끼는 달의 다른 이름으로 밤으로 관념되며 금까마귀는 태양의 상징으로 낮을 의미하고 있다. 두 사례에서 세월은 밤과 낮이 번갈아가며 햇빛과 달빛으로 밝게 지속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 년 중 한번은 아주 밝은 세상 즉, 대명천지(大明天地)에 살기를 원하는 민속 날이 있다. 바로 '정월대보름'이다. 이는 한 해의 시작달인 정월과 첫 보름을 큰 보름이라 부르는 상징적 의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의미와 목적이 있는 날로 생각된다. 대수롭지 않게 대강 보아 넘길 수도 있겠지만 살펴볼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다. 년중에 단 한번 달집을 만들어 태우는 행사는 밝음에서 찾을 수 있다. 유일하게 일 년 중 단 한번 해와 달이 함께하여 세상을 밝게 하는 의식의 날 정월대보름 '달집살이' 의식이라 말할 수 있다. 발광체 해인 일(日)과 반사체 달인 월(月)이 함께하면 밝은 명(明)이 된다. 달이 떠오르기 시작과 동시에 달집에 불을 사리는 행위는 바로 대명천지 세상을 만끽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월인 대보름과 달집이 함께한 순간은 대명천지가 되는 순간이다. 정월대보름은 만월과 달집(산 모양의 집을 말함)살이에서 해(日)와 달(月)이 함께하면 각각의 밝음보다 갑절 혹은 몇 배로 늘리는 밝음(明)이 되기 때문에 만월에 달집살이를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본질에는 지혜의 증장을 바라는 달집살이 의식이 감추어져있기 때문에 달집태우기놀이에만 결코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현재는 시대적으로 불필요에 의해 의식의 본질보다 놀이의 현상에 치우쳐 달집태우기로 변천된 세시민속놀이임을 팁(tip)으로 알면 좋겠다.
 쇄언하면 일과 월을 합치면 '명(明)'이 된다. 명을 만드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달집살이 의식이다. '달집살이'에서 '살이'는 '서낭치기'에서 '치기'와 '나례(儺禮)'에서 '예(禮)' 등 유사 개념으로 의식을 위한 정신과 육체 등 조심하고 주의하고 삼가는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의식이기에 '달집태우기'라는 표현은 본질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답습된 이언적(俚言的) 표현이라 하겠기에 달집살이가 설득력이있다.

 민속적으로도 밝음을 강조하는 의식이 또 있다. 제사상의 촛불이다.
 촛불은 밤의 제사나 낮의 천도재에 구분 없이 켠다. 밤에 어두워서 촛불을 켠다는 해석은 현상적인 접근이다. 낮이나 밤이나 밝은 곳이나 어두운 곳이나 분별없이 촛불을 켠다. 촛불은 결코 어둠을 가시는 빛이 아닌 망자의 지혜를 증장시키는 방편의 본질적 접근이기 때문이다. 이는 지혜를 증장시키는 광명인 것이다. 진언(眞言)도 풀이하면 명(明)으로 삿된 것을 밝음으로 물리치거나 예방하는 의미이다.
 밝음은 예술의 표현에서도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어두움(dim)이 부정적 표현이라면 100% 풀(Full)은 긍정의 밝음(bright)을 나타낸다. 회화적으로도 밝음을 강조한 것을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 왕이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곳에는 항상 일월이 함께 그려진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가 배경으로 있다.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의 의미를 왕의 위엄과 권위를 드러낸다고 해석하지만 보다 본질은 백성을 보살핌에 밤낮없이 어둠 없는 밝은 세상을 구현하는 의미가 더 강조된다.

 밝힘은 성경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창1:3),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의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계2:1), 빛은 곧 밝음으로 세상을 만드는 것에서도 빛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중풍병자(마8:6), 문둥병자(마8:2), 고창병자(눅14:1), 혈루병자(막5:25), 손마른자(막5:31), 눈먼자(눅18:18), 귀신들린 자(마15:22), 열병자(마8:14), 앉은뱅이(행3:2), 귀머거리(막7:35), 벙어리(막7:35), 간질하는 자(마4:24) 등 모두를 거져 고치신 것도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 로다"(요9:5)라고 말한 '세상의 빛'에서 기인한다. 세상의 빛은 어둠과 장애몸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밝음과 건강함 몸과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무엇이던지 할 수 있는 온전한 능력자이기에 가능하며 세상의 빛이라 부르는 이유이다.

 밝음의 중요성은 불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자성광명(自性光明)·반조(返照) 광명진언(光明眞言), 대광명전(大光明殿), 대광보전(大光寶殿), 대적광전(大寂光殿), 보광전(普光殿) 등 광명을 많이 사용하는 이유이다. 붓다는 무명(無明)의 타파를 강조하고 있다. 무명은 어리석음이며 어리석음은 중생을 일컫는 말이다. 부처의 궁극적인 중생제도는 지식의 주입에 있는 것이 아니나 지혜력을 높이는 것이다. 지식의 이해와 지혜의 깨달음은 같은 것이 아니다. 중생에게 무명을 밝히는 것은 지혜를 늘어서 인간답게 살게 하는 것이다. 부처를 깨친자, 위신력자라고 부르는 이유도 오직 어리석은 중생, 무명속에서 방황하는 중생의 지혜 증장을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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