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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가

28년 전, 첫 아이를 낳고 키운 그 집에는 대추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임신한 몸으로 그 집에 이사를 했는데, 집보다도 먼저 내 눈에 들어왔던 나무였다.

 아기가 태어나는 봄에 나뭇가지마다 잎이 뾰족뾰족 돋으면 탄생하는 새 생명에 대한 기쁨이 두 배가 될것 같았다. 아기를 안고 제 손톱보다 작은 잎을 보여주면서 놀고 싶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잎사귀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아기의 두 눈도 반짝반짝. 상상만 해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삼월에 아기가 태어났다. 예쁜 여자아기였다. 눈, 코, 입, 손발은 물론 속눈썹과 손톱, 발톱 등 너무 작고 얇아서 빠트릴 수도 있을 텐데 앙증맞게 자리한 게 신기했다. 세상에서 아기를 처음 본 것처럼 말이다. 농사일에 바쁜 시어머니께서 산후조리를 일주일만 해주고 가셨기에 산모라고 누워 있을 수만 없었다.

 시동생 두 명과 친정 막내 동생과 함께 기거했기 때문에 매 끼니 챙기기와 빨래야 청소 등 일이 많았다. 반복되는 집안일이 힘들었지만 불평은 없었다. 갓 태어난 아기가 그것을 잊게 했다. 그 와중에도 매일 육아일기를 썼을 정도니 조그만 아기가 내게 온 기쁨은 표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아침마다 옥상에 하얀 기저귀를 너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눈을 시리게 할 정도로 하얀 기저귀를 너는 일도 뿌듯했지만, 이웃 집 옥상에서 빨래 널고 있는 민주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무엇보다 좋았다. 내가 당시 스물다섯이었고 민주 엄마는 서른 중반이었으니 나이 차이가 좀 있었다. 그녀는 상냥하면서도 말수가 적었다. 주로 내가 종알거렸다. 나날이 다른 아기의 변화에 대한 신기함부터 시작해 나중에는 이런 저런 시댁과의 유쾌하지 못한 이야기도 일러주듯이 했다. 그러면 민주 엄마는 '힘들지? 그러면서 어른이 되는 거야'라며 웃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마음은 까닭 없이 불안해졌다. 기대했던 대추나무도 잎을 쑥쑥 피워주지 않았다. 뻣뻣한 가지마다 움을 틔우고 전기에 감전되듯 금세 초록 잎으로 뒤덮일 것 같은 대추나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무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터라 대추나무는 잎을 늦게 틔운다는 걸 몰랐다. 혼자 우는 날이 많았다.

 그게 산후우울증이란 걸 몰랐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즐거웠지만 그 외의 나는 불안하고 슬펐다. 그 당시 어디에서 읽었었나, '인간은 저마다 고독한 하나의 섬이다.'라는 문구가 나를 휘감았다. 눈치 없는 남편은 나를 위한 구원병이 아닌 것 같아서 속내를 보이지 않았다.

 옥상에서 만나는 민주 엄마한테 구원 요청을 했다. 왜 난 아기를 이토록 사랑하는데 불안하고 슬픈 건지, 왜 이렇게 대가족 속에서도 외로운 지,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외로워서 죽을 것 같은 나한테 제발 편지 좀 해주세요. 기저귀를 탁탁 털어 널 듯 병든 마음을 탁탁 민주 엄마한테 던졌다.

 전화벨이 울렸다. 받았는데 낯선 여자 목소리다. "나야, 민주 엄마야. 놀랬지?" 정말 민주 엄마였다. 옥상에서 빨래 널 때만 만나는 사이였고 전화 통화는 처음이었다. 옥상에서는 잘도 종알대었는데 갑작스레 전화를 받으니 당황해서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자기가 제발 편지 좀 해달라고 했잖아. 그래서 편지를 써서 그 집 마당으로 던졌는데, 대추나무에 걸려 버렸어. 얼른 나가 편지 따."

 후다닥 뛰어 나가니 세상에, 정말 휑한 대추나무에 하얀 편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심장 박동 소리가 너무 크면 두 눈까지 가리는지 편지를 펼쳤는데도 글이 안 보였다. 몇 번이나 호흡을 가다듬고 편지를 읽는데, 한 줄 한 줄이 꼬이고 뒤틀린 내 마음을 쓰다듬고 풀어주었다.

 저 어린 사람이 어찌 결혼을 빨리 했나, 늘 친정동생 같아서 안쓰럽다면서 옥상에서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당신 이야기를 했다. 부유하고 행복하기만 할 것 같은 그 삶도 답답하고 혼자 울어야 하는 일이 많다며, 불안에 떠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 편지 끝에는 예쁜 꽃이 많이 피는 당신 집으로 놀러오라고 적혀 있었다.

 답장하듯 난 얼른 아기를 업고 그 집으로 놀러 갔다. 가서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혼자 조잘조잘 떠들고 웃었다. 그녀는 친절하게 두 귀를 내 쪽으로 다 열어두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웃었다. 그렇게 산후우울증은 거짓말처럼 걷혔다.

 나의 외로운 대추나무에 피었던 하얀 편지 꽃. 나의 산후우울증을 낫게 했던 달콤한 시럽 같은 그 편지가 사무치게 그립다. 나의 한 곳이 뭉텅 사라진 것 같은 요즘이다. 천지를 둘러봐도 혼자인 것 같은 쓸쓸한 나는 또 편지를 받고 싶다. 병든 나에게 약 같은 편지 보내줄 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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