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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요즘 들어 사이란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출발이 어디서부터였는지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으나 동인 중 한 사람이 쓴 시 '사이'를 읽은 이후였던 것 같기도 하다. 가끔 사이를 써놓고 차이로 읽기도 하고, 차이를 써놓고 그 사이를 생각하기도 한다.

 지난달 일주일 정도 러시아 여행을 다녀왔다. 떠나던 날 울산은 벚꽃이 지고 어린잎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연두빛 일색이었다. 두어 시간 후 인천 일대 갯바람을 맞으며 보얗게 핀 벚꽃을 보고 환호했던 기억을 다 지우기도 전에 모스코바에 도착했다. 모스크바는 첫 날부터 손끝 아리는 추위와 진눈깨비로 우리를 맞았다. 불과 9시간 전 화창한 봄을 지나온 우리 앞에 가로의 헐벗은 나무들이 맨몸으로 서 있는 모습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머릿속에서는 러시아의 위도와 날씨를 충분히 이해했으나 몸과 마음이 느끼는 혼란스러움은 머리가 헤아리는 이해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몸이 느끼는 것보다 마음이 느끼는 혼란스러움이 더 큰 것 같았다. 몸은 준비한 옷과 모자로 적응하며 따라가는데, 마음은 울산의 연두빛, 인천의 벚꽃, 모스크바의 진눈깨비가 뒤죽박죽 돼 휘청거렸다. 정확하게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이 나라에 대한 나의 몰이해도 혼란의 사이를 메우기엔 벅찬 요소 중 하나였다. 이후 며칠은 러시아의 변덕스런 날씨와 당혹스러울 만치 화려한 옛 왕궁과 익숙하지 않은 붉은 빛깔과 가끔 나타나는 공산주의 국가 시절 표식과 영화에서 보았던 적국 군인들 모습에서 굳어지는 몸과 마음을 달래야 했다. 비록 세계에 문호를 개방했다고는 하나 아직은 다 메울 수 없는 이념과 이질적 정서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를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려 애쓰며 일정을 소화했다.

 어렵사리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울산은 그 사이 유치원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것만치나 부쩍 자란 신록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방을 돌아봤으나 믿어지지도, 쉽게 적응되지도 않았다. 며칠 시차 적응하느라 바깥출입을 삼갔고, 두통에 시달리느라 바깥 풍경을 염두에 둘 짬이 없었다. 그러다 턱 밑까지 쫓아온 신록을 아파트 아래로 내다보면서 낯선 세상에 서 있는 느낌을 받았다. 너울거리는 푸른 잎들의 유혹에 이끌려 밖으로 나가보니 그간 아파트 입구 살구나무는 살구 몇 개를 엄지만큼 키워놓았고, 강변의 이팝나무에선 하얗게 꽃이 일고 있었다. 도무지 얼떨떨해 머릿속 계절을 간추릴 수가 없었다. 울산 있을 때도 매일 확인한 것도 아닌 살구열매에게서 배신당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떠난 것은 나였는데 서운한 것 또한 나이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이 메워지지 않는 골을 나는 사이라 규정하며 허둥대는 나를 설득 중이었다.

 어느 날 '사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깜작 놀랐다. 무려 9개의 설명과 단위까지. 그 중 몇 개만 옮겨보면 공간적인 틈, 시간적인 겨를, 서로 맺은 관계 등이다. 한꺼번에 정리되는 느낌이었지만, 확실하게 그어놓은 듯 내린 설명이 오히려 서운했다. 무언가 사이와 사이에는 더 있을 것 같았다.

 사이를 줄줄이 나열해 놓고 이런 저런 사이를 거닐며 가장 먼저 나와 관계되는 모든 이들에게 걸어가 보는 사이. 사람과의 사이에 놓인 유지하기 어려운 그 적당한 거리가 떠올랐고, 놓쳐버린 숱한 시간의 사이들도 떠올랐다. 시간의 사이를 금방 회복하지 못하는 것은 나이 탓도 있겠지만, 사실은 2주일이 흘러가도 메워지지 않는 그 사이에서 내가 서성거리는 이유는 분명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러시아라는 낯선 나라에서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과 툭툭 시야가 끊어지는 우리나라 산야의 차이, 가도 가도 따라오는 자작나무와 우리나라 잡목 숲과의 차이, 웃음과 무표정의 차이, 연두빛과 회색빛의 차이 따뜻한 봄과 봄 같지 않은 봄. 저 차이의 사이에 어쩌면 내가 쉽게 다가설 수 없는 공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다. 이 생각에 닿자 갑자기 눈앞이 환히 열리듯 '사이'의 세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계절과 계절, 의식과 의식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이 '사이'라는 세계에 나는 이미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다만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기에 그토록 혼란스럽고 낯설었던 것이다. 서서히 막연했던 것들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정형화된 것들이 변화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그러기에 눈에 익은 과정의 갑작스런 변화를 나는 그토록 낯설어 했던 것이다. 숱한 경험과 깊은 사유 사이에 이렇듯 오묘하고 신비한 세계가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나는 아직 이 사이라는 세계의 터널을 다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가능하면 더 오래 머물고 싶다. 모든 사이에 존재하는 무릉도원 같은 이 '사이'를 찾은 것이 이번 여행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라면 소득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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