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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가

엄마 생신 쯤 오디가 익는다. 구구구 산비둘기 노래 소리가 한층 구수해지면 뽕나무에서 단내가 난다. 새끼 누에 같은 오디들이 꾸물텅대는 소리. 지난 일요일은 엄마 생신이었다. 오리불고기를 유난히 좋아해서 생신 때마다 향산가든에 오리불고기를 먹으러 갔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새 전동차를 타고 밭에 다녀오던 엄마가 전동차에서 떨어지면서 발뒷꿈치를 다쳤고 깁스를 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다쳤다는 소식 뒤에 생신이 이어져 온 가족이 모였다. 서울 사는 조카 내외도 내려오고, 임신 3개월에 접어든 조카 며느리는 벌써부터 나풀거리는 임부복을 입고 와서 귀여운 유난을 떨었다. 어렵사리 아기 엄마가 된 큰 조카는 5개월 된 아기를 업고 첫 바깥 나들이를 했다. 대식구가 모였다. 엄마를 시작으로 4대가 되는 아기. 4대가 앉아 기념 사진도 찍었다.

 이 와중에도 우리를 은근히 신경 쓰이게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서울 사는 조카의 처. 그러니까 내겐 질부가 되는 새색시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영혼까지 서울 여자인 '그녀'는 시골에는 처음 와 본다며 처마 밑 제비집을 천연기념물 쳐다보듯 하고 감나무에서 떨어진 감꽃을 밟지 못해 서 있었다.

 그녀의 일생일대 첫 시골나들이에 우리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싶었다. 뭔가 특별한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것이 식혜 위의 밥알처럼 떠오는 것이다. 하지만 주변에 특별한 볼거리도 없고, 기막힌 맛집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민에 빠진 우리는 엄마의 생신을 기다렸다가 때맞춰 달큰하게 익어주는 오디를 따러 가기로 했다. 즉석 이벤트인 셈이다.

 생신 상을 물리고 설거지를 마친 우리는 큰 무리를 지어 뽕나무가 있는 고추밭으로 갔다. "뽕나무가 그대로 있겠나?" 누군가가 물었다. 순간 걱정스런 바람이 훅 불어닥쳤지만 우리는 주저 없이 뽕나무를 향해 걸었다. 뽕나무 이파리 사이로 거뭇거뭇 강낭콩만한 오디가 보였다. 우선 손에 닿은 것을 몇 알 따먹은 다음 준비해 간 비닐을 바닥에 넓게 깔고 작대기로 나뭇가지를 쳤다. 우박 떨어지듯 후두둑 소리를 내며 잘 익은 오디들이 떨어졌고 그녀가 크게 웃는 걸 보았다. 한껏 만족스러워진 우리는 팔이 아픈 것도 참고 작대기를 후려쳤다. 남은 오디들이 비닐 위로 장난꾸러기 아이들처럼 뛰어내렸다.

 들고 간 양동이에 오디를 가득 담아 돌아오는 것으로 짧은 이벤트는 끝이 났다. 음료수 페트병에 오디를 가득 담아 서울로 보내고 나자 뿌듯했다. 뭔가 해냈다는 생각에 기분이 업된 우리는 내친 김에 저수지에 고동을 잡으러 가기로 했다. 모내기철이라 물이 빠진 저수지에는 살찐 고동들이 검은 몸둥이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는데 그것을 잡는 손맛이 어찌나 좋은지 신고 간 장화에 거머리가 붙은 것도 나중에 알았다. 찌그러진 세숫대야에는 금세 고동이 가득 찼다. 아직도 고동이 잡히구나.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구나. 가슴이 벅찼다.

 저수지 옆 밭으로 가 돌보는 이 없는 매실이 얼마나 익었는지 확인하고, 베어 내도 베어 내도 자라는 부추도 베었다. 보리피리 불기는 내가 단연 으뜸이었다. 반지꽃을 보고 목걸이와 팔찌를 만들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마늘이 얼마나 익었는지 몇 포기 뽑아도 보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그 옛날 너무도 커보였던 감나무의 키가 엄마처럼 작아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친 김에 가재라도 몇 마리 잡을까 생각했지만 뱀이 많은 철이라서 그것만은 참기로 했다.

 한바탕 고향 들녘을 헤집고 돌아오면서 고향의 변하지 않은 얼굴을 생각했다. 그대로라는 것. 그대로 있어 준 것들에 대한 고마움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은 그대로인데 몸이 늙고 마음 밭에 잡초가 자라고 주변이 변한다고 하지만 고향에 오면 마음이 그대로인 나를 만나게 된다. 어릴 적 나였던 그 아이를 만나게 된다. 가끔 나이를 세어보면서 움츠러드는 일들이 고향에 오면 무색해진다. 오디를 따고 고동을 잡고 가재를 잡을까 싶어지면 그대로인 나를 만날 수 있어서 익숙한 일도 새롭고 셀렌다.

 마음에 추억이 오롯이 등기돼 있으니 한 장 한 장 꺼내보는 일은 나를 어리게 한다. 내게는 둔하고 미련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고향이, 그래서 그대로인 축복 같은 고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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