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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남구 개운포에는 울산의 젖줄로 불리는 태화강에 가려 주목받지 못하던 강이 하나 있다.
 바로 울주군 청량면 율리와 그 인근에서 발원해 완만한 산골과 들판을 가로질러 곧장 동해로 흘러드는 외황강이 그곳이다.
 그렇게 길지도, 그렇게 넓지도 않은 이 작은 외황강은 동해와 만나 작은 포구를 이루어 신석기인들의 안식처가 됐고, 대외로 뻗어나간 신라의 항구가 됐으며, 조선시대 경상좌도수군절도사가 머문 영성(營城)의 흔적을 갖고 있다.

 개운포의 작은 마을이었던 황성동 세죽마을에 공장들이 들어서고 확장되면서 증가하는 물동량을 감당하기 위해 2009년을 전후해 울산 신항만 연결도로 등이 곳곳에 개설되기 시작했다.
 이때 조개무더기와 모래로 뒤섞인 땅속에서 예상치 못한 고래뼈가 출토돼 학계는 물론 울산시민들을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름 하여 '골촉 박힌 고래뼈'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신석기인들이 사슴뼈를 뾰족하게 가공한 골촉으로 그간 논란이 돼 왔던 신석기시대 포경 활동에 대한 적극적이고 실물적인 증거로 우리들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돼 있는 '성암동 패총'에는 신석기인들의 생활 폐기물인 조개 껍데기와 짐승뼈, 물고기뼈, 석기나 토기의 파편 등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당시 그들의 생활 모습과 자연 환경 등을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살펴보면, 우리가 거닐고 있는 개운포 그 자체가 바로 과거 신석기인들의 자취를 밟고 있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개운포의 생생한 역사는 신라 헌강왕(875~886)이 개운포에 들린 일에서도 만날 수 있다. 
 외황강 하구에 놀러온 헌강왕이 돌아갈 즈음 갑자기 들이닥친 구름과 안개 때문에 일행이 모두 길을 잃게 됐다.
 이 모두가 동해용이 부린 조화라는 것을 알고 헌강왕이 동해용에게 절을 지어주겠다 약속하자 놀랍게도 안개와 구름이 걷혔다는 이유로 지금의 '개운포(開雲浦)' 지명이 생겨났다.
 신라왕이 찾아 온 개운포, 그리고 동해용의 출현 및 길을 잃을 정도의 짙은 구름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 생생하고 긴박한 상황 속으로 우리들을 끌어당긴다.
 당시 헌강왕과 함께 경주로 떠난 동해용의 아들 처용(處容)이 바다에서 올라온 바위가 처용암(處容岩)이다.

 이 처용암은 현재까지 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여전히 개운포 바다 가운데에 남아 '서울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도다. 둘은 나의 것인데,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래 나의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요?'라는 처용가(處容歌)를 부르며 우리들을 손짓하고 있다.
 처용설화는 먼저 무조전설(巫祖傳說) 내지 주술적 차원에서 주로 이해되었다.
 민속학자들과 국문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처용은 용을 모신 신사에 제사를 지내는 무당의 자격으로 신라 경주에 초빙된 용신(龍神)의 아들이라고 한다.
 개운포의 역사성은 개운포성에서 계속 이어진다. 
 개운포성은 조선시대에 동해로 침범해 오는 왜적(倭賊)들을 막아내기 위해 경상좌도수군절도사의 부대가 머물며 조선의 남동해안 방어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이 거대한 군대조직을 운영하기 위해 개운포 인근의 마채염전 등 각처의 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으로 군량을 충당했다고 한다.

 이처럼 개운포는 풀면 풀수록 영화같은 생생한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과거의 역사지만 현재에도 계속되고 미래를 향한 비전을 제시하듯 울산의 '창조도시' 속에서 개운포의 많은 역사문화는 남구를 넘어 울산의 또 다른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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