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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삶을 이겨내고 성공한 사람들을 보고 흔히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 사람 삶은 성공 했어. 후세에 신화가 될지도 몰라." 그러나 이중섭 전시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이중섭은 불행한 시대를 살아 그의 삶이 신화가 된 게 아니라, 고통스런 삶 속에서 열정적으로 꽃 피운 그의 작품이 예술이 되고 그 예술이 그의 삶. 이중섭을 신화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번 전시이름도 '이중섭. 100년의 신화'다.

 이중섭은 1916년에 평남 부잣집에서 태어나 스물한 살에 일본 '문화학원' 미술과에 입학한다. 후배 마사코(한국 이름 이남덕)와 사귀다 1945년 원산에서 결혼하고 두 아들을 낳는다. 뒤이어 6·25 전쟁 발발. 어머니를 남겨 두고 네 식구가 부산으로 피난 온다. 이때부터 이중섭의 고생이 시작된다. 어느 날 어머니의 소포를 받고 이중섭은 이렇게 답을 쓴다.

 "어머니, 그림이 팔리지 않아 먹을 것이 없고 살길이 막막합니다."

    이중섭은 할 수 없이 마사코와 두 아들을 일본 처가로 보낸다. 마사코는 굶어도 같이 살겠다고 울지만, 중섭으로서는 처자식이 굶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홀로 남은 그는 친구 집을 전전하며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다. 꿈을 새긴다. 네 식구가 제주도에 살며 잠시 행복했던 그 때, 게와 새와, 물고기를 은박지에 새기며 각박한 현실 너머 언젠가는 함께 살, 단란한 모습을 은박지에 새긴다. 그리고 틈만 나면 아내와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이번 전시만 잘 되면 꼭 만나러 갈 것이다.'

    그림 밖에 그릴 줄 몰랐던 그는 전시 중에 그림도 팔리지 않고 빚만 진다.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은 물거품이 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아 이렇게 외친다. "그림을 그린답시고 친구한테 빌붙어 먹을 것이나 축내는 나는 예술인이 아니다."

 자학 끝에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 1956년 만 39세인 그는 적십자 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한다. 결국 그는 아내와 자식을 만나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 전시장에 낯익은 그림이 있었다. '왜관 성당 부근', 이 그림은 이중섭이 대구에서 '구상'시인의 도움으로 살고 있을 때 왜관성당을 그려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순심 중고교'에 기증한 그림이다.

 교장실에 걸려 있다가 30년 전에 1억 원에 팔려 지금껏 장학사업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전시장에 있는 이중섭의 모든 그림은 다른 사람의 소장이었다. 은박지에 새긴 그림도 모두 '개인소장'이었다.

 고통 속, 극한의 삶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다. 이중섭이 그렇고. '시리아 난민' 속의 피아니스트 '알크장'. 물감 살 돈도 없으면서 가난하고 고뇌하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 절실하게 그들의 고통을 그리고 싶었던 '반 고흐', 소아마비와 교통사고로 30여 차례 수술을 하고 병상에 누워서도 배 위에 팔레트를 세우고 그림을 그렸던 '프리다 칼로'.

 그들은 모두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들의 삶은 신화가 되었다.

 '알크장'은 시리아 내전으로 난민이 된 피아니스트다. 그는 먼저 떠난 남편을 만나기 위해 유럽으로 이주를 원하고 있었지만, 국경에서 발이 묶인 상태였다. 난민 속의 예술가. '아이웨이웨이'가 그리스 국경의 난민 캠프에서 '알크장'을 위해 특별 연주를 연다.

 비가 올 듯이 흐린 날, 폐허가 된 잔디밭 피아노 위에 얹은 '알크장'의 손이 떨렸다. 감격과 남편에 대한 그리움. 절박함 때문이었을까? 난민들은 그를 지켜보고 있었고 연주 도중 비가 내리자 그들은 '알크장'이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도록 머리 위로 커다란 비닐을 들고 서 있었다. 난민 캠프에서 울려 퍼진 피아노 연주는 캠프장을 넘어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 속으로 날아갔으리라.

 이중섭도 그랬다. 전쟁의 고통, 가난과 병마, 가족을 만나지 못하는 극한의 삶 속에서 그는 그림으로 꽃을 피웠다. 그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우리는 그를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하고 있다. 신화가 된 그의 예술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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