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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가

자동차를 운전한지 어언 8년. 당시 새 차를 샀지만 한 달을 주차장에 잠재우고 있었을 만큼 겁 났던 나는 굳게 결심했다. '나는 전사다! 이제부터 나는 전사 모드로 돌입한다!' 전장에 나가는 병사처럼 몸도 마음도 굳혔다. 그러자 거울을 통해 본 내 두 눈은 형형하게 빛이 났고, 앙다문 입은 믿음직스러웠다. 자신 있었다. 자기 주문이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가, 새기고 또 새겼다. 그렇게 나는 운전적 삶의 전사가 됐다.

 운전도 운전이지만 사고가 났을 때 강하게 대처하기로 마음먹었다. 요즘이야 블랙박스도 있고 양쪽 보험회사에서 직원이 사고처리를 하지만 예전엔 사고 나면 과실에 대한 책임공방이 많았고,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설이 있을 때였다. 사고가 생기기만 하면 나도 무조건 큰소리로 당신이 잘못했다고 윽박지르리라 단단히 벼르었다.

 드디어 내가 그토록 결심한 강한 전사로 등극하는 사고가 났다. 골목에서 나보다 더 겁쟁이 운전자 아줌마와 가벼운 접촉 사고가 난 거다. 난 당당하게 전사의 자태를 드러냈다. 어디서 본 것은 있어 양팔을 허리에 올린 채 따졌다. 어쩔 줄 모르는 아줌마가 안쓰러워 그만둘까 하다가 그래도 견뎌야 한다 싶어 버텼다. 그런데 아뿔사, 바로 아줌마 집 앞이어서 건장한 남편과 아들이 바통터치를 하고 나와 맞섰다. 보험회사 직원이 와서 사고 접수까지 할 일은 아니니 화해하라고 해 그쪽에서 내 차를 수리해주고 일은 쉽게 끝났다.

 집에 돌아오자 이유를 막론하고 누구랑 옥신각신 했다는 게 창피해서 괴롭기까지 했다. 따따부따하던 게 정말 나였나 낯설고 싫었다. 나는 전사가 될 제목이 못 된다는 걸 첫 싸움을 치르며 깨닫고 바로 꼬리를 내렸다. 사람냄새가 나는 운전자가 되자고 다시 결심을 바꾸었다. 그렇게 무던한 운전자로 살다가 이번에 오지게 당했다.

 지난주 집 앞에서 경미한 접촉사고를 냈다. 2차선에 덤프트럭이 모래를 부려놓고 공사를 하고 있어 1차선으로 들어갔는데, 큰 트럭 때문에 안 보이던 차가 신호 정지로 서 있었다. 브레이크를 힘껏 밟았다. 부딪혔나 헷갈렸다. 설마 하고 내려서 보니 내 차 번호판을 조인 볼트 모양이 앞 차 범퍼에 살짝 나 있었다. 싹 닦으면 깨끗해질 정도였다. 참으로 다행이다 싶었는데, 앞 차에서 내린 젊은 여자 운전자의 행동에 내 눈을 의심했다. 그녀는 대형사고가 난 양 한 손은 뒷목을 잡고, 한 손은 허리를 잡은 채 인상을 썼다. 사과를 해야 하는데 상대방의 지나친 연기에 놀라서 '심하게 안 부딪혔는데…', 말꼬리만 흐렸다.

 그 여자는 병원 간다, 범퍼를 교체할 거다, 차를 렌트할 거다 등등 피해자로 요구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어이가 없어서 지인에게 시간을 저리 낭비하는 게 아깝지 않을까 하고 물었더니 돈에 욕심을 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했다. 저마다 삶에 대한 주관이 있으니 상관할 건 아니지만 사람의 관계가 이러해서 되나 상처가 컸다. 보험료가 올라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뉴스 속 세상은 잔인하고 매정해도 내 이웃은 따뜻할 거라는 믿음을 흔들었다. 내 잘못에 대한 관용을 바라기보다 경미한 접촉에 이득을 다 취하려는 사람이 신기하고 이상했다.

 어제 보험 담당자가 그동안의 사고처리에 대한 결과를 통보해 주었다. 목소리가 예쁜 직원은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고 상처 받았을까 생각하니 정말 마음 아프다고 했다. 어찌나 살갑고 이쁘게 위로하는지 나이와 이름을 물어봤다. 둘째 딸 또래였다. 우린 서로 얼굴도 모르면서 딸의 친구인양, 친구의 엄마인양 길게 통화를 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먹구름 같은 마음이 다 풀리고 눈물이 핑 돌았다.

 어떻게든 강하게 보이려고 전사 어쩌구 허세를 부린 건 지금도 부끄럽다. 그래도 그 뻔뻔한 자세가 운전에 자신감을 주었으니 잊혀지지 않는다. 이번에 유별난 이를 만나 한방 먹었지만 내 잘못이 먼저이고, 속상한 나를 안고 토닥이듯 위로해준 아가씨 덕분에 다시 한번 세상이 아름답다는 걸 느꼈다. 시절이 흉흉하다 해도 그 아가씨같이 상처를 어루만지는 기특한 사람이 더 많을 거라는 믿음을 난 안 버린다. 사고처리가 끝나고 나니 그 얄미운 운전자보다 마음을 다해 위로하던 그 상담 전화 아가씨가 더 생각이 나서 감사하다.

 '어비기'는 경상도 말로 '바보'란 뜻이다. 어릴 때 다부지지 못해 엄마한테 '어비기'소리를 어지간히 들었다. 그 어비기가 어른이 됐다고 '똑똑이'로 바뀔까. 생긴 대로 살자. 어비기답게! 주먹 치켜 든 구호는 아니고 중얼중얼 혼잣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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