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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우리가 백만장자가 될 수 있는가는 가능성이기 보다는 가망성이다. 그것은 외부조건이 있는 것이고, 그렇게 될 운 같은 것이 따라주어야 하는 가망 또는 개연성 같은 것으로, 내가 그렇게 될 수 있음이기보다는 그런 것을 '소유'하게 될 수 있음이다. 그것에 비해 청소년기를 지나 우리가 성인이 된다고 할 때의 그 가능성(possibility)은 가망성(probability) 과는 다른 것이리라.

 인간은 태어나서 영유아를 거쳐, 청소년기, 성인기를 지나 노년을 향하여 늙어간다. 그리고 죽음이 최종 가능성으로서 있는 것인데, 죽음의 가능성을 생각할 때 육체적 죽음은 경험적으로 확실한 것이지만 한 인간인 '내가' 죽는다는 것은 이런 육체적 죽음(demise)인 것만이 아니다. 그래서 나라는 한 인간은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언젠가 죽는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알 수 있지만, '인간'으로서 내가 죽을 것이라는 것은 '비경험적'으로 알게 된다.

 이런 식으로 실존철학에서 가망성을 '소홀'히 하는 이유는 가망성은 생물체로서의 수명에 대한 통계 같은 것이며, 그것은 죽음을 다루기보다는 시신 같은 유증 혹은 사망을 다루는 것이다. 통계학은 내 타입의 죽음, 예컨대 '초로의 의사이며 중산층인 정신노동자의 죽음' 이런 식으로 다룰지는 몰라도 내 개별적 고유한 죽음을 다루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의사는 많은 죽음을 목격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 아프고 병이 진행돼 숨이 멈추고 심장이 멎는 그래서 시신으로 바뀌는 그 순간이 아무리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죽음이라고 해봐야 죽음의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오히려 죽음에 대한 것은 셰익스피어 작품 '햄릿'의 독백에서 더 주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하면서 그가 혼자서 이야기하는 것, "죽는 것은, 잠드는 것. 잠들면 아마 꿈꾸겠지. 아, 이게 곤란해. 왜냐하면 그 죽음이란 잠 속에서, 우리가 이 육체의 굴레를 벗어났을 때, 어떤 꿈들이 찾아올 것인가, 이것이 우리를 주저케 한다"는 유명한 독백에서 죽음의 존재의 깊이를 발견하게 되는 게 아닌가.

 유기체에 대한 죽음의 경험에서가 아닌, 아직은 죽음 자체가 아닌, 꿈에서 무엇이 찾아올 것인가 하는 그 끝에 가서, 하지만 '아직은 아닌 끝', 그러면서도 이미 내가 아닐 것으로서의 그런 죽음이라는 것이 오히려 우리를 감히 죽을 수 없게 하는 것으로서, 죽음의 존재인 것이 아닌가.

 우리는 혹 가망성에서 히트를 치거나 하여 백만장자가 되지 못하는 것으로 인생에 대해 실망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백만장자가 된다면 혹 행복을 느낄 줄 몰라도 우연적인 것으로서 지나가버리고, 우리가 인간이 될 가능성을 실현하지 못하면 그것은 다른 문제이다. 아마도 우리가 인간이 될 가능성을 백만장자가 되기 위해 혹 잊어버리고 실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존재했다는 것의 의미가 증발해버리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가망성에서는 거의 완벽했었는데 가능성에서 망가진 이들이 있다.

 알베르 카뮈는 '전락'이라는 소설에서 잘나가는 변호사의 가능성의 타락을 아주 예민하게 추적하고 있다. 잘나가는 변호사이고 외적으로 성공했는데 내적으로는 시달리는 것으로, 파리의 어느 다리에서 여자가 자살하려는 것을 목격하고도 그냥 지나쳤다는 것이 이 전락의 계기가 되면서 외적 성공도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는 이 내적 전락을 견디지 못하고 잘 나가는 변호사에서 '개전한 판사'로 변환을 꿈꾸며 암스테르담으로 흘러들어간다.

 여자가 자살하려는 것을 목격하고 그녀를 구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 그에게 가져온 충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그녀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은 끝이 있다. 아직은 아닌 그 끝에서 육체의 굴레를 벗어났을 때 어떤 꿈들이 찾아올지 몰라 주저케 하는 아직은 아닌 그 끝은 사실은 우리에게 전체에 대한 절망도 가져온다. 우리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고 그 끝은 각자에게 고유한 것으로서 다른 어떤 것으로도 나타낼 수 없으며 오히려 알베르 카뮈의 다른 작품 '이방인'에서처럼 죽음에 가까이 가서야 다시 살아볼 것 같은 삶의 이해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며, '별에서 온 그대'에서처럼 몇 백 년을 살다가 돌아갈 때에서야 그가 피하던 사랑을 하게 되는 식이 아닌가.

 사실 존재가능이라는 것은 무엇으로도 '표상'될 수 없기에 죽음 가까이에 가서야 드러나는 것인지 모른다. 거꾸로 우리에게 영원의 시간 같은 것이 주어져 있다면, 우리는 결코 무엇이 되기 위하여 오늘 나의 고향을 떠나 무엇으로 되돌아오려는 꿈같은 것으로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 같은 것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별에서 온 그대'처럼 사랑하는 자의 운명인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에야 가망성이 아닌 가능성에서 감히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걸고 '진정한 사랑' 같은 것을 할 수 있게끔 되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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