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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니스트

"금메달!! 한국 금메달입니다" 리우 올림픽이 지난 22일 막을 내렸다.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의 국기가 가장 높이 개양돼 휘날리고 국가가 울려퍼진다. 태극기가 휘날리고 애국가가 흘러나오는 그 순간은 가슴에 손을 얹은 선수와 함께 나 또한 가슴이 벅차오르며 울컥한다. 그 순간이 감격스러운 것도 있지만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나 노래가 내뿜는 상징의 힘 또한 한몫 하는 것 같다.
 내가 어릴적 1980년대에는 오후 해질 무렵이면 나라 전체에 애국가가 울려퍼지곤 했다. 그러면 지나가던 그 자리에 서서 국기가 보이는 곳을 향해서 가슴에 손을 얹고 혹은 그 자리에 서서 노래가 끝날때까지 서 있어야 했던 것 같다. 오빠하고 동네슈퍼를 갔다 오는 길에 멈춰섰던 기억이 또렷히 있는데, 언제쯤 그런 의식이 사라졌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과는 많이 달랐던 그 시절엔 반공교육도 받았던 것 같다.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포스터 그림을 그렸던 기억이 난다. 문득 2016년, 지금으로부터 내가 아주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엄청 나이든 사람처럼 느껴진다. 혹시 내 기억이 틀렸나 싶어 옆에 있는 남편에게 물어본다.
 "혹시 어릴때 길거리에서 애국가 나오면 멈춰서서 가슴에 손 얹고 기다렸던 기억 있어?"
 남편 왈,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하고 국민교육헌장을 좔좔좔 외운다. 푸하하하. 역시 나만 이런 기억이 있는게 아니었다.


 어찌됐건 그때는 태극기라던가 애국가라던가 지금보다는 훨씬 자주 접해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 나이 탓인가. 지금 올림픽에서 오랜만에 듣는 애국가는 그때 들었던 애국가 보다 훨씬 좋게 느껴진다.
 작곡가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에 나오는 이 노래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애국가로 지정됐다. 한국 환상곡을 들어 본 적이 있던가?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작곡된 이 곡은 안익태의 지휘로 1938년 아일랜드 국립 교향악단의 연주로 더블린에서 처음 연주됐다.
 합창과 관현악으로 이루어진 교향적 환상곡인 이곡은 태고의 민족탄생 고조선의 개국을 시작으로 일제의 침략, 광복의 기쁨 그리고 다시 찾아 온 비극 6·25전쟁 등 이렇게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눠 표현돼 있다. 한 곡에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그야말로 '한국 환상곡'이다. 나도 전곡을 다 들어본 적이 없었던지라 이 기회에 들어보았다. 곡의 시작을 알리는 도입부만 들어도 이곡에 한국인의 감성이 그대로 녹아들어간 곡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민요가락이며 애국가며 한국인에게 친숙한 많은 멜로디들 때문에 국악 같은 느낌도 있고 한국말 가사도 나오고 어찌됐건 처음 들어도 낯설지 않은 곡임은 분명하다.


 안익태(1906~1965)는 평양에서 출생해 6세때 예배당의 찬송가에 이끌려 음악수업을 받게 됐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일본의 음악학교를 거쳐 미국으로 유학가 공부하며 동양인 최초의 첼로주자로 입단해 교향악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작곡과 지휘를 배우고 빈필, 베를린필, 로마교향악단, 부다페스트교향악단 등을 지휘하며 지휘자로 활동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스페인으로 피난가 그 곳에서 정착하며 살다 1965년 그곳에서 숨진다.
 안익태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한국환상곡을 작곡해 세계곳곳에서 자신의 지휘로 직접 연주하며가슴아픈 한국을 알리는 애국자에서 속속들이 발견된 친일행적들로 친일 인명사전에 수록되기까지…. 안익태와 애국가의 논란은 아직도 끊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와 같은 시대에 그가 태어났더라면? 그의 이름앞에 애국이든 친일이든 아무런 수식어도 붙지 않은, 단지 한 사람의 음악가로 평가받았을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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