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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가

무화과를 먹는다. 식구들이 있지만 먹어보란 말도 없이 혼자서 다 먹는다. 이렇게 한 소쿠리를 줘도 나눠먹을 마음이 없을 정도로 나는 무화과를 좋아한다. 폭식하게 하는 이 무화과 사랑은 엉뚱한데서 시작되었다.

 90년 초반에 김지애의 '몰래한 사랑'이 인기가 많았는데, 가사가 이러하다.  '그대여, 이렇게 바람이 서글피 부는 날에는/ 그대여, 이렇게 무화과 익어가는 날에도/ 너랑 나랑 둘이서 무화과 그늘에 숨어 앉아/ 지난날을 생각하며 이야기하고 싶구나.'

 당시 라디오든 텔레비전이든 틀기만 하면 이 노래가 흘러 나왔다. 웃기게도 이 노래 때문에 무화과를 더 좋아하는 거다. 노래가 몰래한 사랑이라 그런가 무화과도 꼭 혼자 먹어야 더 맛있다. 순전히 혼자 먹기 위한 나의 억지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 노래는 흥겨운 곡인데도 그렇게 슬플 수 없었다. '그대여' 하고 첫 소절을 부르면 나 혼자 사랑했던 그대들이 한꺼번에 달려오는 듯 가슴바닥이 아렸다. 바람이 서글피 불고, 무화과 익어가는 날이라면 딱 지금이지 싶다. 무더위가 주춤하는 새 인사를 하듯 서늘한 바람이 몇 줄씩 불어오는 구월이 막 시작되는 때. 무화과는 익을 때로 익어 손만 대면 기다렸던 듯 툭툭 떨어진다. 내 몰래한 첫사랑도 농익은 무화과 속처럼 달콤하기만 했으면 좋으련만.

 사랑 중에서도 특히 마음바닥을 박박 긁는 사랑은 몰래한 사랑이다. 혼자 쓰는 사랑의 역사는 시냇가에 홀로 앉아 물소리를 듣는 것처럼 외롭고 심심하다. 누가 들을까 불러보는 그의 이름은 물소리 따라 흘러가 버리고, 입술을 앙 다물고 참은 한숨은 체기로 불편하다. 그러다가도 멀리 그의 정수리라도 보일라치면, 하아,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이라도 보게 되면 혼자만의 서러운 사랑이란 것도 잊고 그를 발견한 나도 불 켠 등처럼 환해진다.

 그러나 다시는 몰래 사랑을 하고 싶지 않다. 그만큼 나의 짝사랑은 어리석고 답답했기 때문이다. 사춘기 시절 몹시 좋아한 오빠가 있었는데, 눈 뜨고 있는 시간은 공부시간이고 씻는 시간이고 어느 시간 한 톨 안 흘리고 그를 생각하였다. 그 마음이 하도 커 잠잘 때도 분명히 그를 생각했을 것이다. 나의 그리운 그대는 모범생이어서 그런지 너무도 건전했다.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거나 편지를 쓴다거나 제과점에서 만나자는 약속 따위를 하지 않았다. 학생주임이 불시검문 하듯 불쑥 나타나서는 같이 걷자고 했다.

 깜깜한 밤이었고, 강가였고, 들길이었지만 나는 들풀 향기 그윽한 밤도, 내 사랑도 무섭지 않았다. 그는 아름다운 청년이 다 그러하듯이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낮으면서도 즐거운 목소리로 나에게 말해주었다. 범생이는 연애 매너도 모범인지 한쪽 팔로 나의 어깨를 감싸고 걷는 로맨틱함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이 달달한 풍경이 나에겐 죽을 지경이었다. 둘이 어디 도망가자고 하면 보따리부터 쌀 정도로 그가 좋았지만 내 숨소리가 들릴까봐, 어떻게 여학생이 숨소리가 가늘고 예쁘지 않나 할까봐 제대로 숨을 못 쉬었기 때문이다.

 그가 열심히 자기의 꿈꾸는 미래를 자랑질 하는 동안 나는 참았던 숨을 표시 안 나게 몰래 몰아쉬었다. 이 또한 내 어깨에 두른 그의 팔에 나의 고된 숨쉬기 작업의 낌새가 전해질까봐 숨을 찔끔찔끔 내쉬었다. 은밀하고 달콤한 데이트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내 숨쉬기에만 몰두해서 그토록 좋아한 그의 이야기도 반은 다 흘렸다.

    주로 듣기만 하니 그가 하는 말에 호응 정도로 '네'하고 대답은 해줘야 하는데, 이 짧은 말이 어쩌다 그동안 참았던 숨과 함께 나와 내 목소리는 아주 괴상했다. 나는 그게 창피해서 그 힘든 사랑을 그만두고 싶을 지경이었다. 지금이야 수줍어하면서도 조곤조곤 내 할 말 다 하는 게 특기라고 할 정도로 나의 언변도 수줍음도 성장하고 발전했지만 말이다.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그가 혹시 만나자는 연락이라도 온다면 이젠 고개를 들고 눈도 마주보고 웃으면서 숨도 자신 있게 내쉬고 싶다. 그때 내 사랑은 그러했지만 이후의 사랑들은 숨쉬기를 잘해서 지금까지 무사히 살고 있노라 말하리라.

 아아, 가을이다. 열어 둔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나를 자꾸 부풀린다. 어디로 데려가고, 어떤 사랑을 시켜주려고 나를 이토록 설레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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