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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문득 과거의 기억들로 유쾌해 질 때가 있다. 점잖게 초대받은 자리에서도 그런 기억들로 히죽히죽 웃어서 주변사람들을 난감하게 한 적도 여러 번 있다. 과거의 기억들은 하나같이 즐겁다.
 나는 오래전부터 해가 떨어질 때쯤 산행을 한다. 이름 하여 야간 산행이다. 오늘도 일찌감치 무룡산 야간산행에 나섰다. 모처럼 따라나선 아내가 지난 주 토요일에 무엇을 했느냐고 뜬금없이 물었다. 지지난주 토요일은 기억이 나는데 엊그제 같은 지난주는 도무지 글쎄다. 아무리 기억해내려고 해도 가물가물 했다. "뭘 했지?" 도리어 아내더러 내가 무엇을 했는지 기억해보라고 했더니 아내도 그냥 웃는다. 아마 아내도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기억이라는 것이 해가 갈수록 신기루마냥 가물가물하다. 물건을 들고 옮기는데 누군가 말을 걸라치면 손에 든 이 물건을 왜 들고 있는지 모를 때도 종종 있다. 이를 걱정했더니 의사 친구는 "걱정 말라"고 한다. 왜 물건을 들고 있는지 모르는 것을 걱정하는 수준은 아직 괜찮다는 것이다. "단지 물건을 들고서도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가 문제"라고 다독인다.
 친구의 위안에 걱정이 줄어들기는 해도 여전히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을 벗어날 수 없다. 30~40대 까지만 해도 기억력만큼은 소문이 났었다. 총기가 너무 있어서 탈이었다. 하지만 세월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딘 낫이 됐다. 어제 저녁에는 책장에서 오래된 대중가요집을 꺼내 펼쳤다. 가끔은 먼지를 털어주고 햇볕도 쬐어야 하는데 바쁜 일상으로 한동안 책장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무심코 펼쳤는데 '우중의 여인'이다. 한때는 나의 18번이라고 할 만큼 즐겨 불렀던 노래였지만 첫 소절에서 막혔다. 몇 번을 시도 하다 그만두었다. 기억에서 잊혀진 노래는 세월이 가면서 묵은 논에 잡풀처럼 헝클어져 버렸다.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다가도 갑자기 친구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때도 있다. 요즘은 그냥 편하게 살아보려고 모든 것에서 단순무식 해지기로 했다. 그랬더니 기억력이 복원되는 것 같다. 특히 유년의 기억들이 최신형 스마트 폰 화면처럼 화질까지도 선명하다. 친구들의 옷차림도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다.

 엊그제는 숨이 막힐 만큼 더워서 지난해 11월 여행했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화면이 지지직거리더니 내 유년의 겨울이 나타났다. 화면 속에는 꽁꽁 언 계곡에서 고드름을 잘라낸 친구들이 상대방을 향해 고드름을 겨누던 유년의 전사들 모습이 어떤 박스무비보다 재미가 있었다. 북풍한설을 향해 고드름 칼을 들고 돈키호테처럼 달려 나아갔던 그 시절은 진한 감동이었다.
 아이들이 놀이하다 부러진 고드름을 "오도독 오도독" 부셔먹으면 어른들은 "저러다가 이가 성할까" 하시면서 걱정들을 했다.

 내 또래의 아이들은 바람이 불면 고드름 칼을 놓고 연싸움을 했다. 사기그릇을 부수어서 가루를 내고 이것을 밥풀에 으깨어서 연줄에 먹이고는 친구 연의 줄과 교차하게 해서 먼저 줄을 끊으면 이기는 놀이였다. 연 싸움은 치열했다. 싸움에서 패하면 온종일 공들여서 만든 연을 한 순간 허공으로 날려 보내기 때문에 이기기 위해서는 제갈공명의 지혜가 필요했다.
 때때로 썰매 싸움도 있었다. 썰매를 타고 양측에서 달려와 썰매끼리 부딪혀서 상대방을 자빠지게 하는 놀이였다. 썰매싸움은 지구력이 필요한 놀이였다. 어떤 친구는 밥상 다리를 뽑아서 썰매를 만들었다가 어른들한테 죽도록 맞았다.

 다른 기억들도 무수하다. 겨울날, 교실에서 난로에 땔 장작을 갖고 오라고 하자 남의 집 논에 박혀있는 물꼬 가림 나무를 뽑아오다 들켜서 그날은 학교에 가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철없던 시절의 놀이들이 나이 들면서 유쾌한 기억이 됐다는 것은 무척 기쁜 일이다. 솜씨 없는 나를 위해 들키면 감옥소에 간다는데도 밤중을 틈타 기어이 방천의 철사를 잘라 와서 썰매를 만들어 주었던 친구들, 그들이 보고 싶다.

 오늘은 지진경보가 핸드폰을 진동했다. 벌써 근 보름여가 돼간다. 지진피해를 줄이기 위해 진동이 그친 후 안전지대에서 방송을 청취하라는 문자가 무시무시한 경보음과 함께 화면에 점령군처럼 등장한다.
 모두들 지진공포에 떨고 있는 이른 아침, 집 앞 동천에 나갔더니 강둑에 어느새 호박이 튼실하게 달렸다. 가꾸는 주인이 없는 호박이다. 호박 넝쿨은 주먹만 한 호박덩이를 품고 있었다. 못난이의 상징 꽃이라고 불렀던 호박꽃이 더 없이 아름답다. 덩치가 큰 호박벌이 "웅~웅"거린다. 호박벌들의 방문이 끝나고 꽃이 지면서 탐스런 호박이 또 맺힐 것이다. 며칠 전부터 하늘이 조금은 높아져 보인다. 새털구름도 제법 많다. 추억을 들추기 안성맞춤인 가을이 이미 와 있다. 목젖 아리게 하늘을 보고 있는 순간은 유쾌한 기억들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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