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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은영 울산예총 사무처장
     

입동이 지나고 아침 동천에 나가면 억새를 비집고 흐르는 강물에서 모락모락 안개가 피어오르는 풍경이 참 좋다. 저만치 떠나는 가을이 겨울을 손짓하고 있다.
괜스레 마음이 허해지는 날이다. 다방커피가 생각난다.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떠올리는 과거 다방 풍경은 엊그제 그린 수채화 같다. 아쉽지만 커피향이 물안개로 피어나던 과거 다방은 추억일 뿐이다. 다방 간판이 새벽안개 걷히듯 하면서 그 시절 향수도 사라져간다.
다방이 도심에서는 거의 흔적을 감추었고 시골 면소재지에나 가야 귀하게 볼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삼십대 젊은이들은 아예 다방이란 개념조차 모른다. 다방 하나만 두고도 부모와 자식 간의 문화적 세대 차이가 확연해진다. 도심 어느 전봇대에도 '다방레지구함'이라는 흔하고 흔했던 구인광고는 윤동주 시인의 시구(詩句)처럼 녹이 슨 구리거울 같은 유물이 됐다.

돌아보면 1980년대 말 까지는 지금의 휴대폰 매장만큼이나 거리 곳곳에 다방들이 많았다. 그러던 것이 커피 전문점의 등장과 함께 아가씨가 엽차를 나르던 다방들은 토종어종이 외래어종에 씨가 마르듯 매일 매일 사라지고 있다. 오죽했으면 지각 있는 문화예술인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도심다방들을 거리의 문화유산으로, 문화공간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을 정도다.
짙은 눈 화장을 하고 한복을 입은 마담, 가슴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블라우스에다 짧은 치마를 입은 아가씨가 커피한잔 사달라고 애교를 부렸던 다방은 그 시대의 문화와 예술을 이끌어가는 창작 공간이기도 했다.
당시 다방들은 자욱한 담배연기로 실내가 희부연 했지만 늘 붐볐다.
다방은 구직자들에게는 직업소개소의 역할을 했고 할 일없는 사람들에게도 커피한잔 시켜놓고 눈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유로운 공간이었다. 또 누구를 만나거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다방이 상대를 만나는 유일한 장소였다.
울산에서 알려진 다방들 중 남구 신정동 공업탑 로터리 '원 다방'이 유명했다. 누구를 만나도 '원 다방' 하던 시절이 있었다. 구(舊)도심으로 지금은 문화의 거리로 변신한 중구 옥교동 시계탑 주변에도 다방간판이 이어져 있었다. 울산 동헌으로 가는 길목 종로다방이나 가로수다방은 나이 지긋한 중년 남성들이 즐겨 찾았고, 공간이 넓어서 수시로 모임을 가졌던 명 다방은 일일찻집 장소로도 인기가 높았다. 젊은이들은 시계탑에서 울산교 나가는 길목의 청자다방, 태화극장(현 메가 박스) 맞은편의 맥심다방 등이 아지트였는데 이제는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당시 청자 다방에는 뮤직 박스가 있었고 LP판을 닦던 장발의 DJ에게 노래제목을 적은 메모지를 전달해 놓고 그 노래가 나올 때 까지 무던히도 기다렸었다.
중앙시장 입구의 월성다방도 음악다방으로는 인기가 높았다. 그 맞은편의 예나르 다방도 청춘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월성다방이 동동주집으로 간판이 바뀌는 바람에 무척 서운했던 기억이 새롭다.
음악다방으로 유명했던 곳은 구시가지, 지금의 성남동 D증권 인근 '모아 음악 감상실'이다.
그 때는 이곳에 가면 아는 얼굴들이 수두룩했다. '인디안 밥'이라는 스낵과자를 한 봉지 들고 구석진 자리에 털어 박히면 최소한 한나절은 일어나지 않았다. 흘러간 팝송을 들으며 요즘의 오렌지족이나 엄지 족처럼 그때도 장발의 히피족 문화를 즐겼던 기억이 세삼 어제일 같다.
다방을 북적이던 사람들, 친구가 올 때 까지 시외버스 정류장 다방에서 할 일 없이 성냥개비를 분질러거나 둥개둥개 포개서 매미 집을 지었다 허물고, 때로는 불장난을 하다 성냥 통을 통째로 불 질러서 손님들이 화들짝 놀랐던 것도 모두가 그리움의 대상이다.
추억하면 옛날 다방은 도라지 위스키를 팔았고 사람의 정(情)도 차와 커피에 담아 나누는 따뜻한 공간이었다.   

지금 다방 문화를 즐겼던 50대 이후 중년들은 다방이 사라지면서 나침반을 잃어버린 외톨이가 된 듯 허망하다. 마땅히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향기를 잃어버린 꽃처럼 그저 그렇게 무덤덤하고 시들하게 산다. 약속을 하지 않아도 다방에 나가면 아는 얼굴들을 만났던 그 시절이 못내 그립다.
00다방, 지금도 그곳에 가면 아는 얼굴들이 있을 것 같다.
재떨이마다 수북한 담배꽁초들, 안개꽃으로 피어올랐던 담배연기, 아련한 얼굴들이 뭉실뭉실 소나기구름처럼 몰려들 것 같은 다방, 추억의 공간이 무척 그리워진다.
어느 해보다 복잡했던 올해도 결국은 간다. 달랑 한 장남은 달력이 썰렁하지만 희망의 내년을 기다리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벌써부터 연말 송년회 날을 잡는다고 소속된 단체마다 연락이 답지하고 있다.
일정표를 챙겨보니 이달 말까지는 거의 채워졌고 12월은 절반 정도 일정이 생겼다. 바쁜 계절을 앞에 두고 잠시 과거로 여행을 떠난다. 알딸딸한 추억이 덤으로 수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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